청우헌수필

나무의 행복

이청산 2018. 5. 20. 14:36

나무의 행복

 

나무에게도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명산 경승에 태어나고야산 황지에 태어난 것이 운명일까볕바른 곳에 살고그늘진 곳에 사는 것이 운명일까천 년을 넘어 하늘을 바라고 있고그 하늘의 해 몇 번 못 보고 잦아드는 것이 운명일까.

나무는 태어난 그 자리가 행복이다뿌리 내린 그 자리에서 부단히 생명수를 빨아올리고그것으로 피운 잎이 햇살 쉼 없이 누려 안기만 하면 된다그 일들이란 오롯이 자신의 몫일 뿐 무엇도 그 일을 훼방할 자가 없다.

혹 다른 것이 와서 함께 뿌리를 섞는다면 같이 살면 된다함께 물길을 틔워 저마다의 잎을 돋우고 꽃을 피우면 된다같이 뻗어나다가 어깨가 닿으면 서로 결으면 되고 바람이 불면 더불어 흔들리면 되고 비가 내리면 함께 젖으면 된다.

사람을 보라아니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보라.그 움직이는 것들은 살 자리를 타고나는 나무와는 달리,우선 뿌리 내릴 곳을 찾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그 자리를 얻지 못한다면 마실 물도 쬘 볕도 구할 수 없다명줄을 부지할 수가 없다.

설령 뿌리 내릴 자리를 얻었다고 한들그 자리가 영원한 제 자린가,아니다또 언제 누구에게 빼앗길지 모른다아니다무엇이 빼앗지 않을지라도 움직이는 것들이란 한 자리에 고요히 머물지 못하는 속성들이 있지 않은가.

어디 더 물 좋은 곳이 없을까더 볕바른 곳이 없을까곁눈질을 멈추지 않는다오죽하면 세상 이치를 좀 깨달은 이들이라면 한결같이 욕심을 버리라는 말을 주문처럼 욀까그 욕심들의 끝에서 왕왕 나락(奈落)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그 주문에 눈 감을 수만도 없다.

욕심을 쫓아다니는 이들이든자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들이든 슬픔이니우울이니고독이니 하여몸보다 마음을 더욱 갈라지게 하며 사는 것들도 적지 않다몸과 마음을 간단없이 헤매게 하며 사는 것이다.

떠돌며 살든 머물러 살든 아린 일 진일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때로는 기쁨도 사랑도 환희도 있을 수 있지만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무엇인가모든 게 덧없이 흘러가지 않던가희열에 찬 것일수록 더 맥없이 가버리지 않던가.

나무를 보라돌봐주는 어미 아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안아주는 따사로운 손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어쩌면 무상한 고독 속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그것은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나무는 홀로 그렇게 서있는 것이 자신의 본래 모습일 뿐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나무에게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니다새가 날아와 노래로 깃들이고비와 바람이 와서 보듬어준다햇살이 몸을 감싸주고달빛이 내려와 말벗이 되어준다때로는 사나운 칼바람이 가지를 분지르기도 하지만너그러이 안아주어 그것들을 수그러들게 한다.

나무는 오직 제 자리 하나만 알 뿐인 외곬이라 웃지 말라태어난 자리뿌리 내린 자리만 숙명으로 지키고 있기에 남의 자리를 넘볼 일이 없다시기하고 다툴 일도 없다다른 이들에게 편안과 위안을 줄지언정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세상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지 않은가.

오직 홀로 서있을 뿐인 나무들에게도 이웃은 많다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이웃들과 팔 뻗어 손잡고 정을 나누기도 하지만향기를 날려 보내 마음을 주고받기도 하고벌 나비를 불러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이런 나무를 두고 어느 철학자는 인간들보다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대화를 나누며 산다고 했다.

나무는 언제나 싱그럽다목숨을 다할 때까지 푸른 잎을 돋우어내고 각색 꽃을 피워낸다움직이는 것들은 늙어가는 한 길 밖에 모르지만나무는 철따라 치장을 달리 할 뿐 언제나 청춘이다.어느 해라도 푸른 잎 피워내기를 거른 적이 있던가.

나무는 죽음 앞에서도 겸허하다인간 세상처럼 죽음의 절차 따위란 필요 없다묻힐 곳을 달리 찾지 않아도 된다선 자리에서 내려앉으면 된다바람 따라 풍화하면 되고 빗줄기 따라 스며들면 된다새싹 되어 다시 솟아나면 된다.

나무는 행복하다오직 제 자리 하나 잘 건사하면 되는 것도 행복이고,친구들 스스로 찾아와 놀아주는 것도 행복이고이웃들과 함께 서로 어깨를 결으며 향기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행복이고사는 동안 늘 청춘으로 치장할 수 있는 것은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무의 행복은 저 혼자만 누리지 않는다저들을 보는 이들에게도 그 행복의 마력에 젖게 한다누군들 저들을 보고 고요와 편안과 위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스스로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저를 대하는 모든 것들을 행복하게 한다.

뿐만 아니다나무는 상상력의 근원이다나무는 상징이 되고 은유가 되고 제유가 되어 많은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그리하여 보는 이의 삶을 풋풋하고도 넉넉하게 한다때로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늘로 전해주고하늘의 뜻을 땅에 전해 주는 영매’(우찬제, ‘나무의 수사학’)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다이 또한 나무가 발휘하는 얼마나 큰 행복의 힘인가.

누가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이양하, ‘나무’)고 했다던가이 어찌 한두 이의 소망일까누군들 나무가 지닌 행복나무가 주는 행복을 어찌 바라고 싶지 않으랴그래서 나는 오늘도 소망의 영매(靈媒행복 나무의 산을 오른다내가 나무가 되고내가 산이 될 산을 오른다행복의 산소망의 산을 오른다.

행복한 나무를 그리며행복의 나무를 바라며-.(201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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