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게도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명산 경승에 태어나고, 야산 황지에 태어난 것이 운명일까. 볕바른 곳에 살고, 그늘진 곳에 사는 것이 운명일까. 천 년을 넘어 하늘을 바라고 있고, 그 하늘의 해 몇 번 못 보고 잦아드는 것이 운명일까.
나무는 태어난 그 자리가 행복이다. 뿌리 내린 그 자리에서 부단히 생명수를 빨아올리고, 그것으로 피운 잎이 햇살 쉼 없이 누려 안기만 하면 된다. 그 일들이란 오롯이 자신의 몫일 뿐 무엇도 그 일을 훼방할 자가 없다. 혹 다른 것이 와서 함께 뿌리를 섞는다면 같이 살면 된다. 함께 물길을 틔워 저마다의 잎을 돋우고 꽃을 피우면 된다. 같이 뻗어나다가 어깨가 닿으면 서로 결으면 되고 바람이 불면 더불어 흔들리면 되고 비가 내리면 함께 젖으면 된다. 사람을 보라. 아니,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보라.그 ‘움직이는 것’들은 살 자리를 타고나는 나무와는 달리,우선 뿌리 내릴 곳을 찾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자리를 얻지 못한다면 마실 물도 쬘 볕도 구할 수 없다. 명줄을 부지할 수가 없다. 설령 뿌리 내릴 자리를 얻었다고 한들, 그 자리가 영원한 제 자린가,아니다. 또 언제 누구에게 빼앗길지 모른다. 아니다. 무엇이 빼앗지 않을지라도 움직이는 것들이란 한 자리에 고요히 머물지 못하는 속성들이 있지 않은가. 어디 더 물 좋은 곳이 없을까, 더 볕바른 곳이 없을까, 곁눈질을 멈추지 않는다. 오죽하면 세상 이치를 좀 깨달은 이들이라면 한결같이 ‘욕심을 버리라’는 말을 주문처럼 욀까. 그 욕심들의 끝에서 왕왕 나락(奈落)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그 주문에 눈 감을 수만도 없다. 욕심을 쫓아다니는 이들이든, 자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들이든 슬픔이니, 우울이니, 고독이니 하여, 몸보다 마음을 더욱 갈라지게 하며 사는 것들도 적지 않다. 몸과 마음을 간단없이 헤매게 하며 사는 것이다.
떠돌며 살든 머물러 살든 아린 일 진일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기쁨도 사랑도 환희도 있을 수 있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무엇인가. 모든 게 덧없이 흘러가지 않던가. 희열에 찬 것일수록 더 맥없이 가버리지 않던가. 나무를 보라. 돌봐주는 어미 아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안아주는 따사로운 손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무상한 고독 속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나무는 홀로 그렇게 서있는 것이 자신의 본래 모습일 뿐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나무에게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새가 날아와 노래로 깃들이고, 비와 바람이 와서 보듬어준다. 햇살이 몸을 감싸주고, 달빛이 내려와 말벗이 되어준다. 때로는 사나운 칼바람이 가지를 분지르기도 하지만, 너그러이 안아주어 그것들을 수그러들게 한다.
나무는 오직 제 자리 하나만 알 뿐인 외곬이라 웃지 말라. 태어난 자리, 뿌리 내린 자리만 숙명으로 지키고 있기에 남의 자리를 넘볼 일이 없다. 시기하고 다툴 일도 없다. 다른 이들에게 편안과 위안을 줄지언정,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 세상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지 않은가. 오직 홀로 서있을 뿐인 나무들에게도 이웃은 많다.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웃들과 팔 뻗어 손잡고 정을 나누기도 하지만, 향기를 날려 보내 마음을 주고받기도 하고, 벌 나비를 불러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이런 나무를 두고 어느 철학자는 ‘인간들보다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대화를 나누며 산다고 했다. 나무는 언제나 싱그럽다. 목숨을 다할 때까지 푸른 잎을 돋우어내고 각색 꽃을 피워낸다. 움직이는 것들은 늙어가는 한 길 밖에 모르지만, 나무는 철따라 치장을 달리 할 뿐 언제나 청춘이다.어느 해라도 푸른 잎 피워내기를 거른 적이 있던가.
나무는 죽음 앞에서도 겸허하다. 인간 세상처럼 죽음의 절차 따위란 필요 없다. 묻힐 곳을 달리 찾지 않아도 된다. 선 자리에서 내려앉으면 된다. 바람 따라 풍화하면 되고 빗줄기 따라 스며들면 된다. 새싹 되어 다시 솟아나면 된다. 나무는 행복하다. 오직 제 자리 하나 잘 건사하면 되는 것도 행복이고,친구들 스스로 찾아와 놀아주는 것도 행복이고, 이웃들과 함께 서로 어깨를 결으며 향기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행복이고, 사는 동안 늘 청춘으로 치장할 수 있는 것은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무의 행복은 저 혼자만 누리지 않는다. 저들을 보는 이들에게도 그 행복의 마력에 젖게 한다. 누군들 저들을 보고 고요와 편안과 위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스스로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저를 대하는 모든 것들을 행복하게 한다. 뿐만 아니다. 나무는 상상력의 근원이다. 나무는 상징이 되고 은유가 되고 제유가 되어 많은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보는 이의 삶을 풋풋하고도 넉넉하게 한다. 때로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늘로 전해주고, 하늘의 뜻을 땅에 전해 주는 영매’(우찬제, ‘나무의 수사학’)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또한 나무가 발휘하는 얼마나 큰 행복의 힘인가. 누가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이양하, ‘나무’)고 했다던가. 이 어찌 한두 이의 소망일까. 누군들 나무가 지닌 행복, 나무가 주는 행복을 어찌 바라고 싶지 않으랴. 그래서 나는 오늘도 소망의 영매(靈媒) 행복 나무의 산을 오른다. 내가 나무가 되고, 내가 산이 될 산을 오른다. 행복의 산, 소망의 산을 오른다. 행복한 나무를 그리며, 행복의 나무를 바라며-.♣(2018.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