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수건 한 장

이청산 2018. 4. 30. 15:24

수건 한 장

 

그 때 나는 봄이 오는 소리라는 제목으로 지역의 어떤 기관지에 이런 글을 썼었다.

 

…… 오늘의 이 출범식을 사람들은 잔치라고 생각했다. 잔치였다. 작아져만 가는 동네, 살기가 고단해져만 가는 이 산골 마을이 이제 좀 나아지리라는 소박한 기대와 축복이 어린 잔치였다.희망의 잔치였다. "뭐가 나아져도 나아지겠지."

사람들은 직원들이 나누어주는, '○○○농협 출범식 기념'이라 찍힌 수건 한 장씩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 발길을 돌렸다. ……

 

십여 년 전어느 이른 봄날사람들은 지역의 영세한 세 농협을 합쳐 크게 하나로 만들면 지역의 경제가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그 희망을 안고 통합 농협의 출범식이 열렸다조합원과 자산이 크게 불어나게 된다는 경과보고에 이어 진행된 의식 절차에 따라 새 간판의 막을 벗기고 테이프를 잘랐다나도 그때 지역의 한 기관 책임자로 초대 받은 축하객이 되어 테이프 자르기에 동참했다.

부녀회원들의 분주한 수발로 소담한 연회가 베풀어지고유지들의 건배 제의로 축하 분위기는 절정을 이루었다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이제 피어나기 시작하는 봄꽃처럼 환한 얼굴에 희열이 피어났다모든 의식이 끝나고 저마다 풋풋한 희망을 안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손에 기념 수건 한 장씩이 들려졌다.

세월이 흘렀다어느 날 늘 하는 대로 해거름 산을 올랐다가 내려와 목욕을 하려는데수건걸이에 걸린 수건 하나가 눈길을 잡았다. ‘출범식 기념이라는 선명한 문구와 함께 그날의 날짜가 변색도 되지 않고 또렷이 박혀 있다많은 사람들의 아린 희망이 깃든 수건이었다흘러간 세월이 생생한 영상이 되어 머리와 가슴속을 순식간에 흘러가게 했다크고도 힘든 변화들을 겪어내어야 했던 사건들이 파노라마로 꿰어진다.

출범식을 했던 그곳은 한 기관의 책임자로 살게 된 내 첫 임지였다처음으로 책임자가 된 만큼 꿈도 컸었다딴은 열심히 일을 하노라 했지만지금 돌아보면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이태를 근무하고 임지를 바꾸어야 할 처지가 되어 떠나야했지만그곳은 나중에 내 삶에서 뗄 수 없는 인연의 땅으로 남게 된다.

다음 임지는 절해고도를 택했다수 년 전에 부책임자로 근무했던 곳이다그 섬은 풍광이며 인심이 천상의 세계처럼 아름다워 지상의 낙원이라 생각하며 살던 곳이다그 낙원을 다시 꿈꾸며 바다를 건넜다.그 꿈과 더불어 열정을 다해 살았다상부기관으로부터 큰 과제도 얻어내어 기관의 면모를 일신시켰다섬을 더욱 아름답게 해보리라 하고 글 모임을 만들어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을 글로 그려내며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모았다.

좋은 일에는 언제나 진일도 따르는 것일까.나의 그런 애쓰기에 대하여 독려일지 시기일지 시린 눈길을 보내는 이도 없지 않아 마음을 아리게 했다첫사랑의 추억이란 품 안에 품고 있을 때가 아름다운 거라고 여기며 그곳을 떠나온 것은 해포가 지나갈 무렵이었다꿈과 기억을 파도에 씻어 보내며 다시 바다를 건넜다.

내 업의 한생도 바야흐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도시의 규모가 좀 큰 어느 기관으로 옮겨 앉았다지난 세월이 나의 스승이었다 할까흘러간 시간들이 내게 준 교훈을 새기며 좋은 일들만 해보려 골똘했다여러 곡절 속에서 정부로부터 새롭고도 중한 과제를 받아 내가 맡고 있는 기관과 지역사회를 한층 드높일 일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이에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갔다새봄이 오려던 어느 날 나는 은퇴식 단상에 서야했다.

'이런 일을 하고 한 생애를 마친다.'하고 번듯이 내놓을 게 없어 부끄럽다는 말과 함께이제 행복했던 그간의 삶을 뒤로하고 '조용한 시골로 가서 새 삶을 엮어가고자 한다.'고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그날로 생애의 일터를 떠나조용한 시골로 왔다그 곳이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한촌이 될 줄이야 일찍이 누가 알았을까기관을 책임진 첫 임지에희망의 출범식이 열렸던 곳에 정착지를 얻어 다시 온 것이다.

그 때 근무하면서 이곳의 풍광이며 인심이 내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었던 것 같다떠난 지 네 해만에 다시 찾아와 늘 오르내리던 산 아래에 터 잡아 집을 지어놓고퇴임하면서 바로 옮겨 왔다그 세월이 다시 일여덟 해가 흐르는 사이에나는 지금 새소리 바람소리와 더불어 사는 노수의 은자가 되어가고 있다이 운명의 흐름을 나도 일찍이 헤아리지 못했다.

이 수건 한 장이 그 격변의 운명을 함께해 왔다나를 만난 자리에 나와 함께 돌아온 것이다.이 수건과 함께해 오는 세월 동안이 내 삶의 어느 시기보다 땀 흘릴 일이 많았던 시기였다보람의 땀도 흘리고고뇌의 땀도 닦을 때 이 수건이 나를 구순하게 지켜주었다.

세상에 이보다 나와 더 가까운 것이 있을까내가 저를 대할 때면 저는 언제나 내 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늘 보이는 얼굴은 물론 내 살의 깊숙한 곳까지도 속속들이 씻어주고 위무해 주었다그런 저의 존재를 나는 잊고 살았다하늘의 바람이 나도 모르게 내 숨을 쉬게 하듯그렇게 내 곁에 있는 것으로만 여겼다아니 그런 여김조차도 없었다.

오늘 문득 그 날짜 또렷이 박혀 있는 저를 보니 어찌 이리 반갑고도 민연한가내가 살아온 것은 나만의 힘이 아니었구나나를 살게 해준 많은 것들이 있었구나그 모든 것들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구나그런 것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구나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다시 또 잊을지도 모르겠다또 아무런 상념 없이 이 수건으로 나를 닦을지도 모르겠다다 잊더라도내가 사는 것은 나만의 호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으마많은 것들이 어우러져 내가 숨 쉴 수 있는 것임을 깊이 갊아 두마.

한 장의 수건이여!(2018.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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