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팔월의 풀꽃 길

이청산 2017. 8. 23. 11:26

팔월의 풀꽃 길

 

입추 지난 팔월이 시나브로 여름의 자리를 정리하면서 가을을 예비하고 있다또 그런 열정의 철이 올 것이라고 뜨겁게 한 철을 살던 여름을 다독이며보낼 것은 보내고 맞이해야 할 것은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아침이면 언제나 거니는 풀꽃 산책길마을 숲을 지나 강둑길을 걷는다숲에도 둑길에도 어제 피던 꽃의 모습이 아니고어제 서 있던 풀의 모양이 아니다.

상사화더위가 한창이던 하지를 넘어서면서 대궁을 솟구쳐내던 마을 숲의 상사화가 팔월 들머리에서 산형의 진분홍 꽃송이를 화사하게 피워내더니 중순 들면서 꽃잎이 서서히 말라든다꽃을 차마 못 보고 떠난 잎을 서둘러 찾아가는 것일까.

상사화는 지는데어느 시인이 지구의 꼬리라고 한 강아지풀이며이름이며 생긴 모습과는 달리 행복한 연애라는 꽃말을 지닌 돼지풀이 노거수 우거진 숲에 교태를 부리듯 무성해 있다숲이 귀여운 강아지와 행복한 돼지의 놀이터가 된 것 같다.

강둑을 오른다강물이 한층 맑아졌다억수 비에 질탕히 흐르던 여름 물이 아니라 씻겨야 할 것은 씻기고 난 뒤의 조금은 여물어진 물이라 할까.짙푸르던 갈대숲의 빛깔도 한결 아늑해 보인다.

봄여름을 두고 밤을 지키던 노란 달맞이꽃이며 낮을 수놓던 하얀 개망초 꽃은 고개를 조금씩 숙이며 계절의 뒤안길로 들려하고 있지만강둑 길섶은 언제나 온갖 풀이며 풀꽃들의 아리따운 향연이 정겹게 벌어지고 있다.

연붉은 메꽃이며 남빛 미국나팔꽃이 애기목소리 같은 곱다란 소리로 곧장 나팔을 울릴 것 같다박자라도 맞출 듯 사광이아재비(며느리밑씻개)며 쥐손이풀 꽃이 조그맣고 동실한 꽃을 뾰족이 내밀고 있다.

도깨비바늘보일 듯 말 듯 도깨비바늘 노란 꽃이 나도 예 있다며 앙증맞은 얼굴을 드러낸다저 조그만 것이 곧 바늘이 되어 바짓가랑이를 잡고 한사코 매달릴 것이다종자 번식을 위한 의지가 집요하기는 저만한 것이 또 있을까.

지천으로 피어있는 사위질빵 연노랑 꽃이 온 강기슭을 덮어멀리서 보면 여름의 끝자락에 눈이라도 소복이 내려앉아 있는 것 같다강기슭뿐만 아니다그 덩굴이 나무를 타고 오르며 꽃을 피워 마치 눈을 함빡 맞고 있는 성탄목 같다.박주가리

팔월의 풀숲은 덩굴풀의 천지다메꽃나팔꽃 등 한둘이 아니지만 박주가리를 빼놓을 수 없다.한 꽃대에 여러 개 잔꽃을 달고 옆에 있는 푸나무에 기어오르기를 좋아하는데가느다란 덩굴을 배배꼬며 감아올리는 품이 마치 재롱떠는 아기 손놀림 같다.

다른 이를 은근히 성가시게 하는 것은 환삼덩굴이다잎이며 덩굴에 거친 털이 나있어 남은 가까이 오지를 못하게 하면서 저는 다른 것을 된통 감는다그 옆을 스치기라도 할라치면 언제 알고 달라붙듯이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환삼덩굴보다 더 방자히 구는 것이 칡덩굴이다넓적한 잎억센 줄기로 주위에 있는 것들의 약강을 가리지 않고 마구 휘감는다가녀린 풀도 감아 숨통을 조이고커다란 나무에도 겁 없이 기어올라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 치며 잎을 펼친다.

칡덩굴길섶을 도열해 있는 여러 가지 풀대들도 칡덩굴을 만나면 꼼짝 못하고봄이면 현란한 꽃 천지를 이루는 왕벚나무도 둥치며 가지를 마음대로 뒤틀어버린다때로는 걷는 이의 발목을 걸어 넘기기도 한다살아도 저리 무도하게 살 수 있는가.

강둑 길섶을 장식하고 있는 모든 푸나무며 풀꽃들이 사랑스럽고 정겹지만저 칡덩굴만은 두고 볼 수 없다여린 풀을 염치없이 감고 있는 것은 풀어 제치거나 마디를 꺾어 기어오르지 못하게도 하고나무를 비틀고 있는 굵은 덩굴은 나무가위로 잘라버리기도 한다.

저 넝쿨에 내가 왜 그리 분노할까사람을 감고 긁으며 못 살게 굴던 지난날의 어떤 인간사에 대한 아린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어찌하였거나 푸나무 세상은 사람의 일과는 달리 싱그러우면서도 순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그런 자연과 더불어 자연으로 살고 싶다.

팔월의 강둑 산책길을 걷는다명아주비수리,익모초쑥대며 길섶에 늘어선 푸나무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는 팔월의 풀꽃들은 무더운 여름을 건너온 탓인지 그리 크지도 눈부시지도 않다그래서 눈 속 그림자가 더욱 청량히 새겨지는지도 모르겠다.

칡덩굴의 살이 모습이 좀 별스럽긴 하지만팔월의 푸름은 한여름보다 그리 눈 시리지 않아 한결 차분해진 것 같다보고 있으면 여름내 쌓여온 심신의 화기가 조금은 가라앉을 듯하다찬 것은 비워져야 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빛깔로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제 곧 바람이 서늘해지면 푸른빛은 옅어지고 그 빛깔의 자리에 유홍초며 물봉선쑥부쟁이며 구절초가 함초롬히 피어나면서 강둑 풀숲 길은 한층 고즈넉해질 것이다저 왕벚나무 잎사귀는 단풍이 되어 강둑을 수놓으면서 가을을 새기다가 떨어져 갈 것이다.

쥐손이풀인디언들은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일 년 열두 달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데팔월을 두고는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달이라 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잊게 하는 그 하나는 무엇일까바로 팔월일 것 같다.

팔월을 기리는 인디언들의 속내를 온전히 알 수 없긴 하지만아직 열기는 남아있어도 세상을 지치게 하지 않고찬란하여 눈부시지 않지만 빛바래 스산해 보이지도 않는 그 팔월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그 사랑을 통해 문명을 거부하며 자연으로만 살려했던 그들의 삶을 새기려 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팔월 같은 날을그런 인디언의 마음을 살고 싶다뜨거우면서도 고단하지 않고생기로우면서도 들끓지 않는 팔월의 소곳한 삶을 엮어가고 싶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잊어도 그 하나만은 온전히 간직하며 살 수 있는그런 삶을 그려나가고 싶다팔월의 풀꽃 산책길을 걸으며-.(20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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