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꺾어진 해의 생일에

이청산 2017. 9. 24. 10:36

꺾어진 해의 생일에

 

꺾어진 해의 생일 하나를 맞았다저 북쪽에서는 5의 배수가 되는 해를 꺾어진 해라고 하여그런 해에 누구 태어난 날이 되면 세상을 소스라치게 하는 잔치를 벌인다전율스러운 일이지만그들은 그날을 그리 대단하게 기린다. ‘꺾어진 해에 어떤 함의가 있는 것일까.

나도 적잖이 산 어느 꺾어진 해의 생일을 맞으면서인연을 두고 지내온 사람들을 불러 조금은 성대한 상을 차려놓고축복도 받고 환희도 나누면서 한 세상 살아온 자취와 뜻을 그윽하게 새겨보고 싶기도 했다.

어떻게 살아 이 나이를 쌓았던가평생의 다사다난들이 파노라마로 스쳐간다태어나 부모님 사랑으로 자라나고장성하여 나의 가정나의 일을 가져 오다가 이제는 그 일에서조차 물러난 지경을 살고 있다그 사이를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왔는가.

돌이켜보면 소곳한 미소를 짓게 하는 일들희열과 감격으로 목메어 했던 일들도 없지 않은 듯하지만그런 일들은 어느새 자괴와 회한의 묵직한 그늘에 묻히고 만다새겨지는 일이 많아질수록 그 그늘의 두께는 더욱 두터워진다.

내 살아온 모든 일들이 온통 시행착오투성이었던 것 같다깨닫지 못해 과오와 나태를 저지르기도 했지만최선이라고 믿고 했던 일들마저도 지나놓고 보면 실패와 실수를 더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던 적이 한두 번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일들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비소를 받을 일이 생겨나기도 하고다른 사람을 원망할 일이 만들어지기도 했던 것 같다그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간난에 빠져 허덕여야 했던 일들의 기억이 적잖게 뇌리를 스쳐간다.

어떤 부분에서는 남들이 쉽사리 하지 못하는 일들을 무난히 해내어 남들로부터 조그만 능력을 인정받아 보기도 하고그리하여 책임 있는 일을 맡아 해나가기도 했었지만그 일들이 빛나는 보람으로는 그다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나는 어떤 부문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어 본 적이 없다두각을 향한 의지가 그리 강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어쩌다 운이 좋아 무엇이 드러날 듯 보이다가도턱을 넘기 전에 번번이 넘어지고 무너졌다재주와 재능의 한계인 것 같았다.

나에게 남들의 앞장이 될 수 있는 자리가 한동안 주어지기도 했지만,앞장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자질을 별로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그 노릇도 또한 내 삶을 점철해온 시행착오의 과정일 뿐이었다인격과 인품의 한계인 것 같았다.

나는 어떤 문제를 합리적으로 또는 현명하게 잘 해결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도무지 갖지 못했다사소한 일상사에서도 물론이지만 삶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일에 대해서도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여 삶의 방향이 엉클리곤 했다.

그 바람에 나의 온 생애를 힘겨운 굴레 속을 살아가야 하게도 되었고,나로 인하여 평생 고된 멍에 속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내가 행복을 갈무리해 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다시 돌이켜 보아도 내 살아온 삶이란 참으로 덩둘하기 짝이 없다돌이킬수록 괴치와 회한만이 흉리를 가득 채울 뿐자랑스럽고 떳떳한 기억이란 사막에 떨어진 쌀알 하나같이 매몰스럽기만 할 뿐이다.

잘한 일이든 못한 일이든잘난 일이든 못난 일이든 모두 내가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오늘이 더욱 아려지는 것은이 지긋이 꺾어진 나이되도록 살아오면서도 나 이렇게 살았노라고 내놓을 게 없다는 것이다.

버젓한 재산이 남았는가등등한 명성을 이루었는가두터운 신망이 얻었는가화기로운 사랑을 피워냈는가어찌 욕심 부릴 수 있는 일들일까만모든 것이 빈 벌판을 허망하게 스쳐가는 허허로운 바람 같기만 하다꺾어진 생일을 맞은 오늘그 바람소리 더욱 허허롭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몸도 마음도 이리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되게 했을까무엇을누구를 탓할 수 있을 것인가오직 스스로의 삶을 잘 가꾸어오지 못한 탓일 뿐무엇에 까닭을 둘 수 있으랴.

꺾어진 생일의 새벽에 손위 동기께서내가 태어난 날 동기가 생긴 것이 하도 기뻐서 춤을 추며 어머니에게 감사드렸다는 회상과 함께 축복의 메시지를 보내왔다축복 주셔서 감사하지만잘 살아오지도 못한 것 같아 여느 날처럼 조용히 지내겠다고 답을 보냈다동기께서는 오늘의 자리를 함께 하고 싶었을까.

그만하게 살았으면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격려의 말씀을 다시 보내왔지만자랑스러운 게 무엇일지나는 무어라 답을 하지 못했다아이들과 소박한 상 앞에 앉아 묵묵한 술잔만 기울인다아이가 건네주는 술잔 속에 홍조 어린 내 얼굴이 잠겨 있는 것 같다.

어느 소설가는 모든 과거는 모든 현재의 태초이며모든 현재는 모든 미래의 태초’(이외수, ‘괴물’)라고 했다결국 나의 모든 태초를 현명하게 건사하지 못한 탓에 현재도 우둔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어찌하였거나 오늘은 내일의 태초다나에게로 올 미래의 날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오늘의 내 얼굴이 결국은 내 미래의 모습이 될 것이 아닌가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사실일까만다시 한 번 뇌어보고 싶은 오늘이다.

인디언의 격언에 있다던가.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당신이 죽을 때 세상이 울고 당신은 미소 지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내 죽을 때 울어줄 세상은 없을지라도세상의 짐 후련히 벗고 광대근을 가볍게 세우며 조용히 가고 싶다.

그렇게 갈 수 있는 세상이 나에게 와 줄까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린것들의 재롱에 미소를 머금으며 젖은 술잔을 다시 든다.(2017.9.20.)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로 새겨져 있는 삶과 죽음  (0) 2017.10.23
풀베기  (0) 2017.09.30
꽃 이름 맞히기  (0) 2017.09.11
팔월의 풀꽃 길  (0) 2017.08.23
시 외는 삶(6)  (0) 2017.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