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시 외는 삶(6)

이청산 2017. 8. 7. 12:09

시 외는 삶(6)

 

환호와 갈채로 출렁이던 콘서트가 끝났다관객들은 돌아가고 객석은 비었다모두들 꿈결 같은 기억만을 안은 채 일상으로 돌아갔다주말마다 모여 빗줄기 땀을 흘리면서 목소리며 가락을 가다듬던 일도 멀어져 갔다.

아침 산책길을 걸으며해거름 산을 오르며 부지런히 시를 외고잠결 속에서도 사뭇 시를 외며 숨을 고르던 나의 모습도 흘러간 시간 속의 일로 아련해지려 할 무렵무대 장면들이 살아있는 영상이 되어 날아왔다무대에 올라 시를 외고 박수를 받으며 내려오던 일들이 흐르는 영상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그때 여 회원과 함께 등장하여 황지우 시인의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를 외었다중년을 넘는 나이를 살면서도 제대로 살고 있지를 못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는 내용의 시였다중년은커녕 한껏 황혼기를 살면서도 이렇다 하게 살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비추어보며 선택한 시다여 회원이 시 속의 아내 역할을 맡았다.

열심히 외고 다듬은 대로 낭송하기를 애썼다강조해야 할 부분은 높이를 조절하고감정을 세워야 할 부분에는 목소리의 빛깔을 달리하면서-.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아내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받고는 비감한 소리로 답을 해나갔다.

낭송이 끝나고 여 회원과 손을 잡고 무대를 내려올 때 갈채가 쏟아졌다황홀감이 몸을 감았다무대는 몇 사람의 합송과 대금 연주시극 순으로 흘러가면서 다시 내가 여 회원과 함께 등장하여 자작 수필을 낭독하는 순서에 이르렀다여 회원과 단락을 주고받으며 그리움으로 사는 삶의 모습을 풀어나갔다낭독이 끝나고 관객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무대를 내려왔다낭송도낭독도 모든 것이 잘 풀려진 줄 알았다.

그 날의 모든 장면들이 담긴 영상을 마주하고 앉았다오늘은 내가 나의 관객이다회장님의 독송이며 몇 회원이 함께 하는 윤송의 장면들이 아름답고도 정감 깊게 흘러갔다드디어 내 모습을 마주했을 때, ‘저 게 아닌데.’나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나왔다저 게 내 모습이란 말인가내 목소리요나의 억양이란 말인가.

문득 채근담(菜根譚)’의 배우는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어 붓 끝으로 고움과 미움을 이루지만이윽고 노래가 끝나고 막이 내리면 곱고 미움이 어디 있겠는가.”(99)라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연기가 끝나고 막이 내려도 배우의 곱고 미움은 고스란히 남은 것 같았다고운 모습은 가라앉고 미운 모습만 오롯하게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낭송했던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가 오늘은 나의 거울이 되어 내 앞에 걸려있다. ‘나 이번 생은 베렸어에서 끝은 왜 저리 맥없이 내려가는가. ‘베린(버린)’ 생이 한스러워 그러한가.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무엇이 그리 급했던가말하기가 두려웠던가.

그 뿐 아니다.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이라 할 때는 쉼[休止]과 호흡을 그리도 못 맞추었던가. ‘낡은 괘종시계가 오후 두 시를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인가깨달은 목소리가 아닌 것 같다왜 그리 황망했을까.

저 목소리는 또 무엇인가잠겨 있다가 가까스로 나오는 소리 같다시의 분위기를 살려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것 같다얼굴이 달아오른다관객은 어떻게 듣고 무엇을 느꼈을까무슨 마음을 담아 갈채를 보냈을까.

저 모습이 그리 많은 날오랜 시간을 두고 외며 다듬은 결과란 말인가시의 말처럼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이 느껴진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 밸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는 시의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긴장이 나를 눌렀던가 보다.혼자서는 잘 하던 일도 남 앞에만 서면 얼고 작아지는 소심증 탓일까얼마를 더 살아야 마음이 커질 수가 있을까심신이 어떻게 더 닦여야 큰마음으로 남 앞에 설 수 있을까.

돌아보면내 살아온 일들이 늘 그랬던 것 같다늘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마음을 졸이면서어설프고 덩둘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그렇게 살아온 이력이 오늘의 내 모습을 만들었을 것이다그러하다 보니 번듯하게 이룬 것 별로 없이 이리 작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한 세월이 흘러갔지만지난날을 한하고 싶지는 않다해놓은 일 하나 제대로 없을지라도 지금 나에게는 오를 산이며 걸을 강둑이 있고들을 새소리며 느낄 바람 내음이 있지 않은가어쩌면 이것들이 내가 이루어놓은 가장 큰 일인지도 모른다거기다가 내 곁에는 항상 시가 있지 않은가.

시를 외는 마음속에는 샘물 같은 청량감이 있고 잉걸불 같은 따뜻함이 있다아릿한 그리움이 있고 소곳한 사랑이 있다시를 외면 얽히고설켜 있던 마음도 한 가닥 올곧은 실로 풀어지고아린 마음도 화기가 되고,끓던 분노도 화평으로 가라앉는다.

남 앞에서 좀 못 외면 어떤가외고 싶은 시를 욀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관객은 나의 낭송 기술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시에 담겨 있는 내 마음에 젖어 들 수도 있지 않을까.

얼굴을 달게 했던 그 무대조차도 그리움이 되어간다또 몇 줄의 시를 왼다그리고 오늘도 나는 살아간다.

세상의 길이란 길끝에서는삭은 두엄 냄새 같은편안한잠 만날 줄 알았건만 아직 얼마나 더기다려야 저 기막힌 그리움벗어 놓는단 말인가”(조창환,‘나는 늙으려고’)(20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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