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산을 오른다. 큰 둥치 소나무가 또 하나 넘어졌다. 어제만 해도 하늘을 바라보고 섰던 것이 오늘은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편안히 누워 있다. 산의 나무는 모든 자리가 제 자리다. 넘어진 곳도 제 자리고 선 곳도 제 자리다. 잎을 달고 가지를 뻗고 있으면 산 것이고, 오늘의 저 나무같이 누워 있으면 죽은 것이라 할까?산에는 산 나무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은 나무도 함께 산다. 산의 나무는 살아서 산 것만이 아니다. 죽어서도 산다. 산의 나무는 삶과 죽음의 가름이 없다.
창연히 뻗은 가지에 창창히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저 모습만이 나무의 제 모양일까. 울울했던 모든 잎을 다 떨어뜨리고, 둥치는 푸석푸석 말라 외틀어지고, 뿌리도 근기를 잃어 견디다 못해 쓰러진 저 모습은 나무의 자태가 아닐까. 서 있거나 누워 있거나 모두가 나무다. 서 있는 것은 저들대로 부지런한 생명 작용으로 가지를 뻗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만,누워 있는 것은 그들대로 쉼 없는 풍화작용으로 흙이 되고 물이 되어 새로운 삶을 위한 자양으로 몸 바꾸기를 하고 있다.![](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SAN03.JPG)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가. 서 있는 것이 산 것이고, 누워 있는 것이 죽은 것인가. 서 있는 것은 죽어갈 것이고, 누워 있는 것은 다시 솟아날 것이지 않은가. 이 산에 삶과 죽음이 어찌 따로 있을까. 모두 제 모습대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산은 푸나무의 천지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깃들인 곳이다. 온갖 벌레들이 움 지어 살고, 새들이 날고 짐승이 기어와 품에 안기고, 돌이 자리하고 물이 흐르고, 바람이 가슴을 헤쳐 숨 쉬고 있다. 산은 삶과 죽음을 따로 가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두고도 구별 차별이 없다. 미물 벌레라고 내칠까, 나고 들기를 무상하게 하는 금수들이라 성가시다 할까, 옹이처럼 박혀있는 돌이라 탓할까, 물과 바람이 몸을 엔들 아려할까. 산은 모든 것의 터전이다. 벌레에게는 움을 주고, 금수들에게는 잠자리를 주고, 돌에게는 앉을자리를 주고, 물과 바람에게는 길을 준다. 산은 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을 이루는 것임을. 자신의 수족이요, 사지요, 장기인 것을.
이 모든 것들에도 삶과 죽음의 구별이란 있을 수 없다. 모두 산의 한 가지 일일 뿐이다. 수족이나 장기가 몸을 떠날 수 없듯이 이들도 결코 산을 떠날 수가 없다. 산도 이들을 결코 떠나보낼 일이 없다. 머물러도 떠나도 언제나 산에 있기 때문이다. 산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다. 산에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흙도 바위도, 나무도 풀도, 새도 짐승도, 물도 바람도 모두가 한 덩어리다. 산은 이 모든 것의 합창이자 하모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장엄한 합창이 있을까, 더 조화로운 하모니가 있을까.![](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SAN09.JPG) 산의 이 장엄이며 조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산은 어찌하여 모든 것을 어울러 하나가 되게 할 수 있을까. 산은 모든 것을 낳고 품고 산다. 낳고 품어주되 바라는 것도 없고, 간섭할 일도 없다.산은 스스로 살려 하지 않는다. 바로 산의 장엄이요 조화다. 산은 묵언의 말로 산다. 말을 하고 싶을 때는 낳아주고, 사랑을 하고 싶을 때는 품어준다. 낳아주고도 낳았다 하지 않고, 품어주고도 품었다 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대로다. 오직 모든 것들과 함께 묵묵히 있을 뿐이다. 산을 오르며 나 하나의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나의 산은 어디에 있는가. 그 산에서 나는 무엇인가. 흙인가, 푸나무인가, 바위인가, 바람인가. 그리하여 산과 어떻게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가. 무엇과도 화합하지 못하고 ‘나 혼자’인 것 같다는, 그래서 조금은 아릿한 고독감이 스밀 때도 없지 않지만-. 아니다, 내 발 딛고 있는 곳이 바로 나의 산이 아닌가. 무엇도 바라지 않는 이 산의 사랑으로 난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는가. 호불호도 행불행도 가림이 없는 산이지만, 설령 무엇이 어찌한다 할지라도 산은 나를 내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들과 어울리게 해주고 울고 웃게 해준다. 그 울음과 웃음이 내 삶의 합창이 되게 하고 하모니가 되게 하여 내 오늘의 여기까지 오게 했다.
세월이 한 생애를 지나갔다. 아니 숱한 세월이 내 안으로 고여 왔다.줌파 라히리(Jhumpa Lahiri)가 “과거는 흘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저지대에 고여 있다.”고 했던 것처럼-. 이제 나에게 더 흐르고 고일 세월이 얼마나 남았는가. 얼마나 남은들 그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 세월의 끝에 어떤 일이 일어난들 무슨 가탈이 될까. 끝과 시작이 어찌 따로 있을까. ![](https://t1.daumcdn.net/cfile/blog/27266F33597EA4291A)
지금 산을 오르고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이 따로 없는 산을 걷고 있지 않은가. 그 묵묵한 산을 살고 있지 않은가. 산과 한 덩어리가 되고 있지 않은가.내가 이 산의 나무라도 좋고, 돌이라도 좋고 바람이라도 좋다.
나는 산이다. 세상의 모든 것과 함께 사는 산이다. 살고 죽는 것이 따로 없는 산이다. 그 나무고 돌이다. 산의 바람이 청량하다. 내가 그 바람이다. 그 모든 것들의 합창이고 하모니다. 산을 내리는 발걸음이 이리 가벼울 수가 없다.♣(2017.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