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자연의 덕과 더불어

이청산 2017. 3. 13. 15:19

자연의 덕과 더불어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강둑길은 회반죽으로 덮여갔다마을사람들이 바라던 일이었다봄여름이면 잡풀이 돋아 무성해져 걷는데 거치적거린다며비만 오면 군데군데 물이 고여 질퍼덕거린다며길을 포장해 달라고 몇 년 전부터 관에다가 청을 넣었다.

마침내 관이 사람들의 청을 들어 강둑 정자가 있는 곳까지 강둑 풀숲 길을 깎아 내었다양쪽에 거푸집 판자를 대고 철근을 깔고 회반죽을 쏟아 부었다편편하게 다듬었다풀숲 길의 흔적은 회반죽이 깔고 앉았다강둑은 평탄해졌다.

아직 정자 너머로는 풀숲 길이 남아 있지만마을사람들은 그 길도 언젠가는 덮이리라고 믿으며정자라도 편편한 길을 밟으며 오갈 수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그런 마을사람들에게 무어라 할 수도 없는 처지가 안타깝기만 했다.

나는 어찌해야 할까아침마다 가뿐하고 상쾌하게 걷던 강둑 풀숲 길,그 풀숲에 봄이면 냉이꽃씀바귀꽃제비꽃쇠별꽃여름이면 개망초,무릇달개비가을이면 금불초유홍초메꽃쑥부쟁이자세히 보면 꽃 아닌 풀이 없는 이 길을 어찌할까

봄이 익을 무렵 둑에 늘어선 벚나무에 만발한 꽃잎이 꽃비로 날려 길을 덮으면 온갖 풀들과 어우러져 부시게 화사한 꽃길을 이루고철따라 피고 지는 갖은 꽃들과 맑은 미소로 눈인사를 나누며 볼을 쓰다듬기도 하고잎을 잡고 악수를 나누기도 하던 길이 아닌가.

그렇게 걸으며 발이 이슬에 젖어도 마냥 유쾌하기만 했던 길이었는데,그래서 가슴에 차오르는 희열감충일감을 보듬으며 걷던 길이었는데,그리하여 한 생애를 어여쁜 풀꽃 강둑길이 있는 이 한촌에 살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며 걷던 길이었는데.

강둑을 덮고 싶어 하는 마을사람들의 원이며덮인다는 소식이 돌 때마다 혼자만 가슴을 쓸어야 했다풀꽃이 좋아 길을 덮지 말잔들 내 속을 누가 헤아려 줄 것이며더불어 살기를 마다하고 혼자만 꽃길을 즐기겠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쉬움만 커져 갈 뿐이었다사실 그 강둑길이야 농기계며 차들이 굳이 다녀야 할 길도 아니고,간혹 지나갈 일이 있으면 흙길 따라 지나가면 될 일이다풀꽃들과 한데 어울리면서 즐기면서 왜 살 수가 없을까.

잘 닦인 길을 걸으면 풀꽃이 어우러진 길을 걷기보다 몸도 마음도 더욱 편안해지는 것일까이슬에 발을 적실 일 없고고인 물을 피해 다닐 일이 없으면 편리해서 좋기만 할까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고 보는 것보다 더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경치 좋고 바람 맑은 곳을 동경하여 찾기를 즐겨 한다.번다한 삶에 시달리다 보면 산이며 강이며 바다며온전한 자연을 그리워한다내가 그러했듯새로운 생애가 주어지면 나무가 있고 물이 있고 바람소리 새소리가 청량한 곳을 찾아 살고 싶어 한다.

무엇이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 걸까자연에는 무엇을 향한 미움도 시샘도 없고무엇에 대한 다툼도 괴롬도 없고무엇을 두고 뽐낼 일도 처질 일도 없고무엇에 대고 따질 일도 탐할 일도 없고,오직 절로 피고 절로 지고절로 어우러지고 절로 베풀 뿐이다그것이 곧 자연이 지닌 덕이다우리는 그 덕이 그리워 자연을 친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연을 자연대로 두지 않고 사람의 삶에 맞추려고 애쓴다그렇게 하면서 자연으로부터 잇속을 챙기려 하기도 한다그렇게 자연의 덕을 으깨면 무엇이 돌아오는가자연을 고쳐 누리는 편리도 잠시일 뿐사람의 마음을 삭막에 들게 하고공해가 천지를 누비고,급기야는 나락과 파멸의 수렁으로 들게 하는 일들을 우리는 겪고 있지 않은가.

과학 문명과 정보 문화가 이리 발전 발달한 시대를 살면서이런 고답(高踏)을 말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그러므로 자연이 더욱 그립다자연이 자연하는 세상이 그립다자연으로 살 수 있는 천지가 그립다그 문명문화가 빛을 내는 것만큼 우리의 행복도 빛나고 있는가.

물론 자연이 사람을 괴롭히고 불편을 줄 양이면 이겨내고 물리쳐야 한다법정스님도 옛사람의 말을 빌려 풀이 걸음을 방해하거든 깎고 나무가 관()을 방해하거든 잘라내라.” 했다말씀은 이어진다. “그 밖의 일은 자연에 맡겨 두라하늘과 땅 사이에 서로 함께 사는 것이야 말로 만물로 하여금 제각기 그 삶을 완수하도록 하는 것이라.”했다.

강둑 풀꽃들이 사람들과 서로 함께 살지 못할 만큼 걸음을 방해하는가그래서 강둑길을 회반죽으로 휘덮어 풀꽃들의 삶을 눌러버려야 하는가.매끈하게 포장된 길을 걸으면 편한 발걸음처럼 마음도 편안할까꽃을 보고 걸을 때보다 더 아늑해질까철겨움 없이 때맞추어 피어나던 풀꽃들이 그립다군데군데에서 불쑥불쑥 솟아오를 것만 같다.

내 앗긴 한촌 살이의 즐거움 하나를 어찌해야 할까길섶엔 그래도 흙이 남아 있구나그나마 지극한 다행이다저 길섶에나마 철 맞추어 어여쁜 꽃들이 피고지고 하겠지그 작은 위안으로 물 맑게 흐르는 강의 포장 둑길을 걸으며 저 정자 너머의 길만이라도 풀숲 길로 남아주기를 안쓰럽게 빌어본다.

나날이 변해가는 세상이며 그 물정들이야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있을까만한촌을 사는 내 삶의 희망이 가냘프게나마 지켜지기를 빌며 가슴에 손을 얹는다이 길섶으로나마 자연의 덕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기를 간구해 본다.

강둑길을 늘어선 벚나무의 가지에 작은 몽우리가 곰실거린다머잖아 이 길에도 벚꽃이 화사하게 어우러지겠지.(2017.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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