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아귀에 들지 않을 만큼 굵은 나무가 봉분 위에 듬성듬성 서 있는 걸 보니 돌보지 않은 지 수십 년은 된 것 같다. 상석 옆면에 9대손 아무개와 지손 일동이 신유년에 상석을 놓았다고 새겨놓았는데, 그 이후로 돌보지 않았다면 30여 년 묵은 세월이 흐른 것 같다. ‘嘉善大夫金海金公○○之墓’라 새긴 명문을 보면 상석을 놓을 때만 해도 조상에 대한 긍지가 높았던 것 같다. ‘가선대부’라면 참판, 관찰사 등 지금의 차관보쯤은 되는 벼슬이니 조상이 이룬 위업에 대해 긍지를 가질 만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숲이 우거져 묘소에 가까이 가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상석 앞에도 커다란 나무가 자라고 있어 글자조차 가려버렸다. 자욱한 가시덤불이며 푸나무를 헤치고 묘소 주위를 살피다 보니 수풀 속에 나무들이 숭숭 서있는 또 하나의 봉분과 그 앞에 놓은 상석이 보였다. 공(公)의 휘자(諱字)만 다를 뿐, 옆면에도 8대손 아무개라며 앞의 것과 같은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러면 두 무덤의 주인공이 부자지간이라는 말인데, 부자간에 다 가선대부를 역임한 건가? 그렇다면 명망이 대단한 집안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명문가의 후손들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기에 이토록 묵뫼가 되게 했단 말인가. 시 구절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cloud6.jpg) “한적한 산길 섶/ 하늘 지붕 덮고 누운 산바람 우거진 풀숲에/ 세상 부귀공명도 그리움, 사랑, 미움도/ 죄다 버린 지 오래된 묘비 석 하나 쓸쓸하다”(묵묘, 박병일) 지금은 비록 쓸쓸하나 9대손이 조상을 기려 상석을 놓을 때만 해도 사후 2,3백년쯤 흐른 뒷일 것이니 숭조의 정성이 실로 가상타 하련만, 다시 수십 년이 흐르는 사이에 그 치성도 스러져 이리 묵뫼가 되었구나! 내 죽어 차지한 산중 자리에 오랜 세월이 덮이면, 어느 먼 자손이 무덤을 반듯하게 지켜줄 것인가를 생각하니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이들 부자 가선대부의 내력을 알게 되면서, 나는 마을의 유래에 대한 경이감과 함께 세월의 무상감이 저리게 다가오는 심회를 안아야 했다. 내가 찾아와 일여덟 해를 살고 있는 이 한촌은 임진왜란 때 충주에 살던 어떤 이가 피란을 와서 정착함으로써 비로소 마을이 열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마을의 시조가 된 이가 누구라고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마을에 없었다. 마을 뒷산은 내가 늘 오르는 산이다. 없는 등산로를 내어가기도 하며 수없이 오르내리던 어느 날, 우뚝한 등날에 자리 잡은 산소 한 곳을 찾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이 등날을 ‘큰뫼등’이라 부르는데, 산마루를 오르내리는 길과는 줄기가 달라 걸음길 겨를을 갖지 못하다가, ‘큰뫼’라 부르는 그 이름의 유래가 궁금하여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일삼아 가보았다. 제법 널따랗게 조성된 묘역에 용상 머리를 얹은 비석이 버티고 서있는 무덤이 보였다. 그 비석의 비문을 읽는 순간 대단한 사실을 발견한 듯한 충일감과 진작 알지 못한 허탈감이 함께 밀려왔다.
이 비석의 주인공이 바로 마을 시조가 된 분이고, 6세손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함에 5대조인 그가 통정대부로 추증되었다는 것이다. 이 분의 묘소 뒤로 역시 가선대부로 표기된 아들과 손자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고을에는 가선대부를 지낸 분이 이리 많은가. 어찌하였거나 이 분이 마을을 이룩한 덕분에 오늘날 나도 이 마을 사람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여러 후손들이 마을을 이룬 조상에 대한 긍지의 선양을 위해 울력으로 추진위원회까지 만들어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정비한 뜻을 비문에 두렷이 새겼지만, 지금 마을을 지키면서 대를 잇고 있는 후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긍지를 가진 후손들이라면 실제로 가선대부를 역임한 조상의 묘표도 반드시 세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마을 바로 뒤 언덕바지에 있는 커다란 묘소와 비석이 떠올랐다. 묘비석이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잰걸음으로 시조 묘역을 내려와 그 비석이 서있는 곳을 찾아갔다. 짐작이 맞았다. 불과 십여 년 전에 새로 세운 비석은 글자도 또렷이 잘 새겨져 있었다.![](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cloud3.jpg) 그 비석의 비문을 읽는 순간 몇 기의 가선대부 묘와 앞서 본 묵뫼에 관한 의문이 한꺼번에 다 풀렸다. 이 분이 가선대부를 역임하는 바람에 고조부까지 가선대부로 추증되고, 5대조가 되는 마을 시조 어른은 한 품계 아래의 통정대부로 추증된 것이다.영예롭게 된 자손이 누대 조상의 명예를 빛내었다. 비문에 의하면 두 묵뫼의 주인공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되고, 마을 시조의 아들과 손자가 고조부와 증조부가 되는 계보를 이루고 있었다.그래서 모두 추증 받은 가선대부로 표기했던 것인데, 비석도 빛나게 세우고 묘소도 덩실하게 다듬어 놓았으면서도 윗대 두 무덤은 그토록 묵게 방치하였을까. 아마도 세월이 흘러오는 사이에 지손들의 사정이 달라진 탓이리라 여겨지지만, 봉분에 잡목이 우거질 정도로 적조해진 묘소가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그 정도의 벼슬을 지낸 명문가라면 마을에 창연한 고옥이 유전하거나 유허라도 있을 법한데, 마을 어디에도 그런 흔적을 볼 수가 없다. 세월 속에 모두 함몰된 것 같아 무상감만 상념을 아리게 할 뿐이다. 명문가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나 같은 범부야 남길 게 무엇이 있을 것이며, 남긴들 얼마나 보전될 수 있으랴. 법정스님은 살아서도 가진 게 없었지만, 사후에도 흔적 남기지 않으려고 생전의 많은 저작물조차 이승의 말빚이었다며 더 이상 출판하지 말라 하지 않으셨던가. 세상의 많은 분묘들이며 삶의 흔적들이 언젠가는 다 사라져가야 할 것이라면, 저리 묵뫼가 되게 하는 것보다 자취에 메이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것도 맑은 일이 될 것 같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415CF4358CF6D6D1C)
산을 늘 오르내리면서 후손이 지키지 못한 묵뫼를 지나려니, 내가 이들의 후예는 아닐지라도 애석한 마음이 없지 않아, 어느 날은 톱을 들고 올라 상석을 가리고 있는 푸나무들을 걷어내고 명문이나마 드러나도록 해놓았다. 그리한들 묵뫼에 얹힌 무상 세월이 걷어질까만, 내 사는 마을을 이룩한 선인들에 대한 조그만 예라도 드리는 마음의 일로 삼고 싶을 뿐이다. 그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세월은 또 덧없이 흘러가고 봉분은 더욱 깊은 숲으로 덮일 것이다. 그 세월 속에 나도 고요히 묻혀가고 싶다. 산마루를 무심히 흘러가는 저 구름처럼-.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한 조각의 구름이 일고 스러지는 일이라 하지 않았던가.♣(2017.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