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오늘도 일기를 쓴다

이청산 2017. 4. 9. 15:25

오늘도 일기를 쓴다

 

요즈음 내 일기장은 아침 눈뜬 시각산책길 풀꽃새겨두고 싶은 신문 기사읽은 책만나거나 목소리를 나눈 사람아내의 잔소리먼 길 나설 때 말고는 날을 번갈아 오르고 달리는 해거름의 산행과 자전거 타기 같은 별날 것도 없는 소소한 일상들로 채워지고 있다.

일기를 써온 지가 근 사십 년이다그 동안 명멸을 거듭해온 수많은 사연과 사건들 속에서 한 생애가 흘러가고또 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그 사이에 내 삶만 바뀐 것이 아니라삶을 기록하는 도구도 변천을 거듭해 왔다.

처음에는 볼펜이나 만년필 같은 필기구로 쓰다가 전동타자기하나워드프로세서 시대를 거쳐 199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의 ‘한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지금까지 써오고 있다펜으로 쓸 때는 물론 노트에 남지만전동타자기와 하나워드 시절에는 면을 채워 출력해 모아 책으로 묶다가, ‘한글’로 기록하면서부터 저장 매체에 갈무리해 두고 있다.

시대를 따라 다단하게 변해온 필기구처럼 내 삶도 숱한 변전을 거듭해 왔다일기장에 담기 전부터도 그러했지만일기를 쓰기 시작한 중년의 들머리서부터 입때까지 살아오는 동안에는 더욱 크고 많은 고락과 애증의 풍파가 나를 쓸고 갔다그 풍파를 쓸어담고 싶어 일기 쓰게 된지도 모르겠다.

단 몇 줄을 적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써왔다그렇게 써오다보니 일기는 숨을 쉬듯밥을 먹듯 내 생존의 일상이 되어버렸다습성을 넘어 중독까지 된 듯하여 하루도 일기를 쓰지 않고서는 잠자리에 편히 들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밤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 저녁 무렵에 중간 정리를 해두기도 하다가요즈음은 오후 한때 그 때까지의 일을 정리해 두는 것이 몸에 밴 일과의 하나가 되어버렸다밤을 모주(謀酒)에 좀 젖더라도 마무리하고 자기도 쉽기 때문이다.

한촌을 살면서 가끔씩 대처를 오갈 때 차 안의 시간은 사색과 더불어 일정을 정리하는 일에 거의 바쳐진다그 일을 위해 길 나서는 나의 가방 안에는 반드시 노트북이 들어있다내가 직접 차를 부리지 않는 것이 그리 아늑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내 삶의 기록을 위해 일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일기를 쓰기 위해서 내가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본말이 전도되고 있다 할까일기가 나에게 무엇이기에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나도 그 까닭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마약중독자에게 복약의 이유를 대라면 무어라 말할까.

내가 수필 쓰기를 즐겨하지만일기가 수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수필을 쓸 때처럼 문체며 정서를 다듬으며 쓰는 것이 아니라오직 어느 시각에 무엇을 하면서 하루를 살았는가 하는 서사적 기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어쩌면 내 일기장은 기억의 저장고라고 할까요즈음 어떤 첨단 과학자는 인간의 뇌를 컴퓨터와 연결하여 기억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기억을 컴퓨터 속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내려 받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기술이라면 나는 내 일기장을 통해서 벌써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지난 일이나 기억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일기장을 뒤적여 보면 되고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것은 찾기’ 편집을 통해 쉽게 검색해 볼 수 있다.

그 편리 때문에 일기를 쓰고 있는가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쓰고 싶으니까 쓴다는 물색없는 이유를 말할 수 있을 뿐이지만이때 나는지금의 너를 탄생시킨 것은 바로 너의 지난 모든 과거라고 한 생텍쥐페리의 말을 떠올리고 싶어진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깔고 앉아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오늘 내가 한 일들은 어제 일의 바탕 위에서 한 일이고내일을 맞이할 받침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을 정리한다고 할까오늘의 희로애락은 어제의 일에 까닭이 있음을 믿으며 지난 일들을 돌아보기도 한다.

일기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는가그렇게 하는 것은 나의 방법일 뿐이다그렇게 한대서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가그렇지도 않다그러나 남들이 쉽게 가질 수 없는 정인(情人하나 더 두고 있음은 내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일기는 세상의 어떤 친구보다 더 귀한 나의 애인이다그에게는 나의 모든 마음을 다 주고 싶고마음을 얽고 있는 나의 모든 기억을 그에게 곱다시 다 바쳐도 아깝지 않다어떤 피붙이에게 이토록 깊은 속정을 둘 수 있으랴.

그는 나의 어떤 고백도 물리친 적이 없다그는 편년체의 무미한 서술조차도건조체의 메마른 언어들조차도 절대로 거절하지 않는다오히려 그것들을 지성으로 모아 스스로 끓이고 익혀서 맛깔난 문체를 빚어놓기도 한다.

그렇게 내 모든 마음을 곱고도 알뜰하게 간직하고 보듬어 두었다가 내가 원할 때면 젖가슴을 훤히 열 듯 모든 걸 다 드러내 보여준다이런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어찌 다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래서 나는 오늘도 잘잘못이든 행불행이든 내가 지은 이승의 업보들을 서슴없이 모두 털어놓고야 만다.

그런데 이 정겹고도 속 깊은 애인을 내 이승 떠날 때는 어찌할 것인가단연코 데려갈 것이다이 어여쁜 것을 어찌 홀로 남겨둘 수 있을 것인가아니다그 안에 담긴 어쭙잖은 내 생애를 무엇을누구를 위해 두고 갈 것인가. 스님은 그 감동 깊고 유려한 문장들조차 이승의 말빚이라 하여 다 거두려하지 않았던가.

내 최후의 순간에 그를 모두 살라 내 안에 순장(殉葬)시킬 것이다그 지순한 순장을 위하여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왜 내가 살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지이드의 그 희망을 행여 내 애인이 나에게 말해 줄 수 있을까도 기대하면서 나를 꾸역꾸역 담아 넣는다.

오늘도 하루를 중간 정리해 놓고 낙조가 장엄해지는 해거름의 산을 오르고 자전거를 달려 나간다내 일기의 빛나는 마무리를 위하여-.(20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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