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외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기쁠 때는 기쁨을 더해주고 슬플 때는 슬픔을 씻어준다. 그리울 때는 그리움을 재워주고 괴로울 때는 괴로움을 덜어준다. 그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모였다. 두 달마다 한 번씩 모여 정기 낭송회를 열고, 그 즐거움들을 모아 한 해에 한 번 무대를 빌려 관객들 앞에서 시낭송 콘서트를 연다. 다음 낭송회에는 나의 발표 차례도 돌아온다. 어떤 시를 낭송할까. 시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낭송시는 읽기가 쉬워야 하고, 듣기는 더 쉬워야 한다. 듣고 생각해서 느끼는 게 아니라, 들으면서 바로 느껴서 음미할 수 있는 시라야 좋다. 그런 시를 찾자면 많은 시를 읽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시를 찾아 읽는 것도 즐거움이다. 시들을 읽어 나가다가 가슴에 턱 뭔가 와 닿아야 한다. ‘느낌’이 좋다!그런 시가 보이면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이 거면 됐다! 그 시는 나의 낭송시가 된다. 그런 시를 하나 찾았다. 큰 기쁨이다. 몇 사람의 문학인이 자신의 대표작을 실어놓은 작품집 속에 들어 있는 시다.
그 섬에 그를 데리고 가/ 그 섬을 주고 싶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섬을 그에게 주고/ 나는 섬을 그리워하고 싶다/ 그 섬에 외로이 서 있는 등대도 그에게 주고/ 등대에 앉아 있는 갈매기도 그에게 주고/ 나는 다만 등대의 꼭대기에 흐르던 구름/ 손수건만한 구름이나 뜨다가 바라보고 싶다/그 섬에 동백이 피고 동백이 지고/ 그 섬에 꽃송이 바람에 굴려 다니는 날/ 나는 그에게 한 통의 편지를 쓰리라/ 잠 못 이룬 잠들이 다시 깨어나고/ 흐르던 구름이 멈칫, 멈칫거릴 때/ 나는 그에게, 꽃보다 아름다운 그의 이름 앞에/ 한 통의 편지를 쓰리라/ 그 섬에 가 닿는 파도를 떠서, 사무치는 가슴의 소리/ 편지를 쓰리라 강희근 시인의 ‘그 섬을 주고 싶다’라는 시이다. 찬찬히 읽어본다. 입에 익을 때까지 계속 읽으며 나름대로 음미해본다. 주제는 ‘그리움 만들기’다. 사람이란 늘 그리움 속에서 살기 마련이다. 그리움이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듯, 사무치는 그리움 향한 시인의 간곡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나는 그냥 그를 그리워 할 수 있는, 나도 그런 그리움의 섬을 하나 가지고 싶다…. 그 간곡한 목소리에 젖으며 계속 음미하다가 보니 조금 이상한 어법이 눈에 뜨인다. ‘손수건만한’? 이때의 ‘만한’은 ‘집채만 한 파도’이라고 할 때와 같은 용법이 아닌가? 그렇다면 ‘손수건만 한’으로 써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 그 건 단순한 띄어쓰기 잘못이라 치자. 그런데, ‘구름이나 뜨다가’는 또 무엇인가? ‘뜨다[浮]’의 어간 ‘뜨-’에다가 동작의 중단을 나타내는 어미 ‘-다가’를 붙인 걸까? ‘구름이나 뜨[浮]다가…’로 읽기에는 문맥의 흐름이 어색하다. 만약에 ‘뜨다’를 ‘큰 것에서 일부를 떼어내다’라는 뜻으로 쓴 것이라면, 동작을 이어 주는 연결 어미 ‘-어다가’를 붙여 ‘떠다가’로 표기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손수건만한 구름이나 떼어내다가 (그 구름을) 바라보고 싶다’로 읽을 수 있어 순편하지 않은가! 국문학 교수를 역임하신 원로 시인이시라 말의 뜻과 어법을 몰라 그렇게 쓴 게 아니라면, 이 또한 무슨 시적 허용(poetic license)일까?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김현승, ‘눈물’),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조지훈, ‘승무’)처럼? 그것도 이 경우와는 다른 것 같다. 시인에 물어보는 길밖에 없을 것 같아,그리 쓴 의도를 묻는 메일을 보냈다. 열어보고서는 아무 답이 없다. 괜한 것을 묻는다는 걸까?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을 것 같아 ‘뜨다가’의 용법에 대하여 국립국어원에 질의를 하였더니, “생각하신 대로, ‘뜨-’ 뒤에 ‘-어다가’가 붙으면 ‘떠다가’로 써야 하지만, ‘뜨다가’를 쓴 것을 보면, 시인은‘뜨-’ 뒤에 아래와 같이 쓰이는 ‘-다가’를 쓰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라는 답변과 함께 “아이는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라는 용례를 덧붙여 왔다. 그리고 “문의하신 바는 시인의 뜻에 따른 것이므로, 판정하거나 바로잡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 '뜨다가'로 표현하였는지는 그러한 표현을 쓴 시인만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라고도 추신했다. 그 답변이 더 혼란스럽다. 답은 알고 있으면서도 시인의 처지를 고려해 선뜻 말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 섬에 가 닿는 파도를 떠서’에서는 ‘떠서’라 하지 않았는가. 국립국어원의 답변을 붙여서 시인의 뜻을 다시 묻는 메일을 보냈다. 시인은 메일을 열어보지 않았다. 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걸까? 해명할 수 있는 말을 찾기가 어려운 건가? 나의 물음을 공연한 트집으로 생각하는 건가? 그러나 나는 시며 문학이 한 나라 국어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버릴 수 없다. 그 한두 마디가 이 시의 옥에 티 같은 흠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시를 버리지는 않겠다. 전편에 흐르는 정서는 나를 붙잡는 데 그다지 큰 흠이 없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내 지난 삶 속에도 얼마나 많은 흠이 져있는가? 그 흠들 때문에 내 삶을 버릴 수 없듯이 이 흠으로 시를 버릴 것인가. 세상을 살면서 흠으로 버리기를 능사 삼으면야 사람이며 물건인들 버려야할 게 좀 많을까. 나는 언제나 그리움을 찾아가며 살고 있다. 내 그리움이 있는 곳에 그리움의 시가 있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시 외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2017.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