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의 정원 지키기

이청산 2016. 11. 16. 20:40

나의 정원 지키기

 

아침 산책길을 나선다우선 노거수 우거진 마을 숲에 들러 가벼운 맨손체조와 함께 숲에 서있는 운동기구로 간단한 운동을 하고 강둑길로 올라선다.

강둑에는 왕벚나무가 줄지어 서있고계절을 따라 온갖 풀이며 풀꽃들이 길섶을 수놓고 있다.봄에는 봄까치꽃이며 달개비꽃여름에는 개망초며 금계국가을 들면서 유홍초며 메꽃벚꽃이 해사하게 피어나는 봄철에는 온 강둑이 꽃 천지다.

갖가지 풀꽃들과 함께 걷는 강둑길도 오롯하지만 우거진 강풀 사이로 흐르는 물이 언제나 아늑한 청량감에 젖게 한다철따라 바뀌는 풀빛 따라 물도 빛을 달리하면서 계절의 정감을 진득이 배어나게 한다.

물은 졸졸 흐르기도 하고 콸콸 흐르기도 하고큰물 지면 황톳물이 온 강을 다 채워 위세롭게 흐르기도 하지만하늘 맑은 아침이면 윤슬을 반짝이며 흐르는 것이 마치 은하가 아침 새 빛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다.

발길은 길섶의 풀꽃에 묻고눈길은 강물의 윤슬에 실어 강둑을 걷다보면 수풀 사이를 조근조근 흐르던 물이 강풀을 제치며 큰 기지개라도 켜듯 질펀히 퍼져 온 강을 그득 담고 있는 보()가 나타난다.

물막이로 물을 모아 봇도랑으로 흘려 백곡의 젖줄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만모인 물은 조그만 호수를 이루면서 맑은 물속에 온갖 풍경을 다 담아낸다하늘도 구름도 담고앞산도 건넛산도 담고강둑의 풀꽃도 왕벚나무도 다 담고 있다.

하늘빛 구름 빛이 저의 빛이 되고산에 강둑에 피는 꽃이 모두 저의 꽃이 된다익은 봄날에 이 강물을 본 적 있는가해사한 왕벚꽃의 현란한 빛은 물속에서 더욱 찬연해진다.강도 둑도 한판으로 어우러진 꽃 잔치판이 된다.

어찌 하늘빛 꽃빛뿐일까백로며 왜가리가 시시로 날아와 놀다가고,물오리는 마치 저의 안뜰인 양 유유히 노닌다저들이 날고 노는 모습을 보노라면 삶의 신산(辛酸)이란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보의 강물은 고여 있지만 훤히 비치는 물낯은 언제나 맑고 깨끗하다.새로운 물이 흘러들고 고였던 물은 물문으로 내리흐른다늘 새 물새 얼굴로 모든 풍경들을 해맑고 포근하게 안고 있다.

아침마다하루 이틀을 보고한 해 두 해를 겪는 사이에 물의 마음과 내 마음은 하나가 되어갔다바람 불어 물결 지면 내 마음에도 파문이 일고푸나무 그림자가 흔들리면 내 몸도 고요치 못한 것 같았다.

보의 물은 나의 정원이 되어갔다물은 내 마음을 품고 나는 물의 마음을 안는다내밀한 마음을 주고받으며내가 저를 가꾸고 저가 나를 다듬는 은밀한 정원이 되어 내 속에 들어앉는다그 물 앞에 서면 세상의 순정한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아늑하고도 부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강에는 빛깔도 곱지 못한 무슨 부유물이 둥둥 떠내려 왔다그것은 물막이 한쪽의 봇도랑 어귀에 걸려 켜켜로 재여 갔다물문을 통해서도 많은 것이 떠내려갔을 것이다재이는 것이 점점 불어나더니 역겨운 냄새가 봇둑 위에까지 치올라 왔다.

무엇일까무엇 때문일까언제나 나를 청신하게 해주던 나의 정원이 저리 되다니내 가슴한쪽에 오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심한 악취가 메스껍게 솟구쳐오는 것 같았다실망과 절망이 저 오물처럼 엉겨왔다.

어느 날 아침 목 긴 신을 신고 물풀을 헤치며 물로 들었다물을 거슬러 올라갔다부유물은 놀랍게도 분뇨 덩어리들이다별로 삭지도 않은 것이 보란 듯이 떠내려 왔다진원지를 찾아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수십 보쯤 거슬러 올라갔을 때 맨홀 하나가 보였고주위에는 거기서 솟은 오물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 맨홀은 두어 해 전에 마을로부터 강을 가로지는 오수 관로를 설치하면서 지은 것이다오수를 모아 종말처리장으로 보내는 시설로흘러드는 양을 다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맨홀을 박차고 나온 오물이 온 강물을 된통 분탕질한 것이다.

나의 정원을 지켜내기 위한 간난의 분투가 시작되었다폭발한 맨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증거를 확보하여 관()에 알렸다담당부서에 전화도 하고매체를 통하여 고변도 했다수차례 진정을 한 뒤 어느 날 관에서 분뇨차 한 대를 몰고 와서 봇도랑 어귀에 재인 오물을 걷어내었다임시변통일 뿐이었다.

예산도장비도 없어 당장 처치하기가 어렵다며큰비가 와서 씻겨나가기를 바란다고 했다무엇에다 쓰는 것이 관의 예산이며이 과학의 시대에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서 될 일이냐며 항의를 했다관을 직접 찾아가 목에 힘줄을 세우기도 했다. .

그 시간들이 해를 훌쩍 넘긴 어느 날 커다란 굴삭기가 와서 맨홀 부근을 파헤쳤다한참을 파다가 다시 묻었다이제는 괜찮아질 거라 했다그 후로도 부유물은 쉽사리 그치지 않더니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강물이 조금씩 맑아져 갔다내 마음도 조금씩 개어가는 듯했다.

어느 날 아침 나의 은밀한 정원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내 가슴속으로 다시 들어왔다억새 하얀 꽃 사이를 흘러온 물은 새뜻한 왕벚나무 그림자를 보듬어 담고노니는 물오리를 포근히 안으며 파란 하늘빛을 머금어 갔다.

그립고 그리운 이를 다시 만난 듯한 감격이 물결 위로 밀려왔다이 날을 위하여 그리 많은 애를 태우고 속을 끓였던가내 마음에 낀 허물 하나를 벗어낸 것 같았다새 마음을 하나 결어낸 것 같았다내 속의 무엇 하나를 이겨낸 것 같았다.

저 생광한 물을 보며 생각한다여태의 생애에서 나는 또 나의 무엇을 이겨 보았던가저 맑은 물속으로부터 우둔과 나타로 얼룩을 지어온그 부유 덩어리 같은 내 삶의 부분들이 떠오르고 있지는 않은가?(201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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