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뒷산은 철마다 한 번씩 꽃 잔치판을 이룬다. 봄에는 생강나무꽃이며 진달래꽃, 산벚꽃이 노랗고 붉고 하얀 빛깔로 어우러져 그야말로 울긋불긋 꽃 대궐을 이루고, 여름에는 명도와 채도가 다른 갖가지 푸른색으로 싱그러운 녹음의 세상을 이룬다.
가을에는 늘 푸른 소나무나 노간주나무 말고는 단풍나무, 벚나무, 생강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등 거의 모든 나무들이 저마다의 가을빛을 내면서 한바탕 단풍의 향연을 벌인다. 그 잎들이 낙엽 되어 온 산을 휘덮은 어느 겨울날 눈이라도 내릴라치면, 속세의 티끌이란 다 묻어버리고 가장귀마다 소복소복 설화가 피어나 눈부신 순백의 꽃 천지가 된다. 그런 계절의 변화란 어디에 있는 어느 산인들 그렇지 아니할까만, 이토록 일매지게 커다란 봉오리를 만들어 성대한 꽃의 향연을 벌이고 있는 산은 나는 그리 흔하게 보지를 못했다. 내가 다른 곳을 다 두고 이 한촌 숲정이를 찾아와 살고 있는 까닭도 이들이 철 맞추어 빚어내는 꽃 잔치판과 무관치 않다. 어쩌면 가장 큰 소이연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탁류에 조금도 은결들지 않은 그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어 한촌의 나날을 아늑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단풍철이다. 금빛으로 물결치던 들판은 은풍한 부요를 남기고 검은 흙을 드러내었지만, 그 들판에서 바라보는 뒷산은 찬연하고 현란하다. 노랗고 푸르고 붉고 누르고 한 저 얽히고설킨 빛깔들의 황홀을 무슨 말로 풀어내랴. 차라리 잠시 말을 내려놓는다. 그냥 멍하니 바라보는 것으로 저들이 빚어내는 빛깔의 향연에 답하고 싶다. 말로 드러내려다 오히려 저들의 참모습에 티를 지울까 주저로워서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해거름 산을 오른다. 대체 어떤 색소를 머금고 있기에, 서로 어찌 어우러져 있기에 저토록 찬연한 빛깔의 오로라를 이루는 것일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강나무 잎이다. 아기 손바닥 같은 잎에 든 노랑 물이 곱다. 나지막이 서있는 생강나무 노란빛과 함께 간간히 보이는 단풍나무 붉은빛이 정취를 돋워주고 있지만, 벚나무며 상수리나무는 너무도 훌쩍해서 우듬지 고운 빛을 볼 수가 없다. 들판에서 마을에서 바라볼 때 웅장한 교향악처럼 찬연히 어우러지던 빛깔이 산속에서는 오히려 한미하게만 보인다. 그 현란하던 빛깔들은 허공을 꾸미고 있을 뿐, 낙엽 밟히는 소리만 바스락거릴 뿐이다. 우뚝한 나무들 속에서 노란 빛으로 가을 산색을 지키고 있는 생강나무 잎을 다시 본다. 이제 막 고운 빛으로 물들고 있는 것도 보이지만, 거뭇한 반점이 점점이 서려있기도 하고, 어떤 잎은 서서히 말라 들기도 한다. 조금은 처연한 모습이라 할까. 우리가 그리 고와하는 단풍이란 무엇이던가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푸르던 것이 물기를 얻지 못해 서서히 말라가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줄기의 수분을 지키기 위해 줄기와 잎자루 사이에 떨켜[離層]를 만들어 수분의 소비를 막는 것이다.
수분을 얻지 못하는 잎은 말라가면서 짙고 옅은 여러 가지 노란빛으로, 붉은빛으로 변하여 가을 산을 꾸민다. 그 빛이란 물을 공급받지 못하는 중에도 계속 일어나는 광합성에 의해 초록색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나타는 색소들일 뿐이다. 어느 시인은 ‘풀꽃’을 두고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나태주)라고 했지만, 단풍을 두고도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사랑스럽다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풀꽃’의 그 사랑과 어찌 같을 수 있으랴. 단풍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생명작용의 엄숙함에 먼저 마음이 기운다. 여름 그 푸른 활력으로 열매를 품어주고, 바뀌는 철을 따라 고운 물빛으로 세상을 장식하다가 새 잎눈을 배태해야 할 줄기들을 기꺼이 떠나 미련 없이 모태의 뿌리로 돌아간다. 그것을 보며 우리는 시리고도 숭엄한 아름다움에 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단풍의 생물적, 관념적인 감상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풍을 어찌 그렇게만 볼까. 단풍을 보는 마음에 어찌 정서와 감각이 일지 않을까. 그 마음으로 한 철을 장식하는 단풍의 아름다움에 순박하게 젖을 양이면, 그 찬탄으로 우리의 가슴을 데울 양이면, 들판에서, 마을에서 눈을 들어 그 자색을 볼 일이다. 그렇게 멀찍이에서 바라볼 일이다. 가까이서 볼 때보다는 적절히 거리를 두고 감상할 때 더욱 아름다워 보이던 전람회의 그림처럼 바라볼 일이다. 그렇게 저들을 바라보면 산속에서는 볼 수 없던 우듬지가 얼마나 고운가. 저 빛이 얼마나 찬란한가. 여기서 우리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한 찰리 채플린의 말을 상기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단풍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다가 그 고운 잎들이 가지를 떠나더라도 상심에 젖지 않아도 좋다. 저들은 다시 찬연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까. 모든 생명현상이란 다 그렇지 아니한가. 
어느 시인은 ‘사랑법’을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강은교) 실눈 사랑법-. 사랑이란 멀찍이서 지그시 음미하는 것이란 말이겠다. 자연의 모든 이법 앞에서 겸허하라는 말이겠다. 그러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이겠다. 이 또한 우리가 단풍을 보는 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빈 들판에 서서 단풍을 바라본다. 불타는 아름다움으로 이 가을을 장식하다가 순명으로 기꺼이 낙하할 빛들의 향연을 지그시 그은 실눈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단풍을 바라보며 세상일을 그린다. 가까이서 보아 사랑스러운 것도 있지만, 멀리서 보아 더욱 아름다운 것도 있는 세상을-.♣(2016.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