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디지털 세상의 빛깔보다는

이청산 2016. 11. 1. 15:18

디지털 세상의 빛깔보다는

 

바람소리 새소리와 더불어 사는 이 한촌에도 스마트폰은 손을 떠나지 않고 있고, 인터넷도 제 세상을 골똘히 띄우고 있다.

사는 일이 갈수록 복잡다단해지고, ‘정보라는 것이 홍수를 넘어 해일처럼 우리의 일상사를 휘덮고 있는 지금, 오히려 일상을 간소하게 꾸리는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삼아 디지털 단식(斷食)’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같은 디지털 기기가 제공하는 통제하기 힘든 정보의 홍수가 오히려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디지털 단식이란 이러한 폐해를 물리치기 위해 디지털 기기와 멀어지고자 하는 생활방식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어느 교수는 정보의 풍성함이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진실하지도 못하고 정확하지도 않은 디지털 정보가 일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정서를 황폐하게 만들 때, 디지털 기기의 폐단은 더욱 심각해지기도 한다.

인터넷에 정약용(丁若鏞)목민심서(牧民心書)’에 나오는 말이라 하면서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로다.”라는 잠언적인 시 구절과 함께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한 것은/ 필요 없는 작은 것을 보지 말고/ 필요한 큰 것만 보라는 뜻이라며 그럴 듯한 말로 이어지는 글이 동영상으로까지 만들어져 인터넷을 풍미하고 있다.

목민심서43권 어디를 찾아보아도 그런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앞부분의 밉게 보면이채라는 시인의 시 구절에서 따온 것 같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린 사람은 글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대학자인 정약용을 빙자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 글일지라도 진실을 기만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라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사실에 대한 확인 과정도 그치지 않은 채 자기의 글 속에 버젓이 인용하는 문필가들의 글을 보면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어느 지방지에 자신을 시인으로 소개한 한 칼럼의 집필자는 서두에서부터 정약용의 목민심서나이가 들면서……나이 든 사람인 것을 알아보게 하기 위한 조물주의 배려라고 한다.’는 글이 있다. 좋은 기억과 아름다운 추억만 담아 두라는 뜻일 것이다.”라며 당당히 소개하고 있다.(경남매일 2015.3.15)

어느 명망 있는 수필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인 단체에서 발행하는 문학지에 목민심서에는 늘 읽어도 좋은 이런 주옥 같은 글도 나온다.”면서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끝자락에서는 다산 선생의 말씀처럼, 가끔 힘들면 숨 한 번 크게 쉬고 하늘을 바라볼 일이다.”하면서 호기까지 부리고 있다.(한국문학인, 33)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유력 일간지의 한 칼럼에서는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 '늦가을'이지요. 되돌아보며 추억하게 되는 때입니다. 윤동주 시인도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라고 이 계절에 삶을 돌아본다 노래했지요.”라며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다.(조선일보, 2016.10.29)

윤동주의 유일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는 그런 시가 실려 있지 않다. 윤동주의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라며 인터넷에 떠도는 것을 아무 의심 없이 차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SNS를 통해서도 많이 떠돌고 있는 글이다.

이 모두가 문헌 자료를 통해 얻은 지식이 아니라 인터넷을 맹신한 데서 얻은 잘못으로, 잘못인 줄도 모르고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어찌 이뿐이랴.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수많은 잘못된 정보들이 디지털 세계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정보들에는 사실이 아닌 것들도 많고, 사실과는 관계없이 백해무익한 정보들도 허다할 것이다. 정보의 소비자들은 그런 정보에 대해 아무런 비판이나 확인 없이 받아들여 재생산하게 되면 악순환이 계속되어 그 양은 점점 불어나게 된다.

상당한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까지도 디지털 속의 지식을 왕왕 맹신하여 마구 퍼뜨린다. 가공할 파급력을 지닌 디지털 매체의 특성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적, 정서적인 폐해를 겪어야 할까. 상상할수록 오싹한 전율이 느껴진다.

이런 일들을 보면, 나도 지금 당장 아주 작은 삶의 실천자가 되어 디지털 단식에 뛰어들고 싶다. 내가 지금 물 맑고 산 좋은 곳을 찾아와 사는 까닭이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오염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서가 아니던가.

그러면서도 선뜻 그 단식에 나서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도 알게 모르게 디지털 기기에 많이 매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중독을 어이할까.

다른 방도가 없다. 헤어날 수 없다면 진실에 대한 확인만이라도 게을리 하지 말 일이다. 단식할 수 없다면 소식(小食)이라도 해서 중독 증세를 줄여 나갈 일이다.

디지털 글자에 쏟는 눈길보다 종이 속의 글자에 마음 더욱 깊일 일이다. 모니터 속에 빠져들기보다는 풀꽃 하나라도 포근히 품을 일이다.

현란하게 돌아가는 디지털 세상의 빛깔보다는 물빛, 산빛이 더욱 맑고 싱그럽지 않은가.(2016.10.29.)

 

      ※註 : 이 글의 게재 이후 윤동주의 시라고 잘못 인용한 칼럼을 게재한 일간지의 인터넷판에서는

             해당 부분을 삭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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