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권 선생의 불꽃

이청산 2016. 10. 17. 21:21

 

권 선생의 불꽃

 

 

권 선생과 마주 앉아 술잔을 들면 많이 취한다. 누구하고 잔을 마주한들 많이 들고서야 취하지 않을 수 있으랴만, 권 선생과 함께 앉으면 취하는 줄도 모르고 많이 취해 간다.

그는 지역에서 존경 받는 원로 어른이시다.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활달한 모습으로 무슨 일에든 정성을 다하려 애쓴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함께 즐기려 하고, 뜻있는 일이라면 앞장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와 마주 앉으면 종종 중국 송나라 학자 주신중(朱新仲)이 말했다는 오계(五計), 즉 먹고 살 계획(生計). 건강하게 살 계획(身計), 가문을 빛낼 계획(家計), 잘 늙을 계획(老計), 잘 죽을 계획(死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제 우리 나이에는 생계, 신계, 가계 걱정도 벗어날 수는 없지만, ‘어찌하면 잘 늙다가 잘 죽을 수 있겠느냐?’하는 걸 더 많이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혼자서 잘 살고 잘 늙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고도 했다.

시골 사정이야 어디나 다 그렇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조그만 지역에도 노인네들이 대부분인데 함께들 잘 늙어 가야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말만이 아니었다. 일만 하고 놀 줄도, 건강을 돌볼 줄도 몰라서는 안 될 일이라며, 벌써 십여 년 전에 노인 산악회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쯤, 오르기도 좋고 놀기도 좋은 산을 찾아다니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수년 전부터는 문화유적답사회라는 걸 만들어 계절 따라 한 번씩 전국의 경치 좋고 유서 깊은 곳을 찾아다니는 일을 이끌다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모임을 문화진흥회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운영해 오고 있다. 모이는 사람들이 모두 지역의 어른들인데, 무언가 바람직한 문화를 만들고 건전한 기풍을 세워 후진들에게 본이 될 수 있도록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모임을 통해서 문화유적 답사는 물론, 명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도 열고, 알아두어야 할 상식과 지식을 담은 문헌 자료도 만들어내는가 하면, 지역의 사라져 가는 속지명(俗地名)을 표기한 지명도(地名圖)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살고 있는 땅 이름도 잘 알아야겠지만, 조상의 산소며 자신이 생장한 곳을 표기해 놓고 보는 것만으로도 고향 사랑하는 마음이 일지 않겠느냐며 지역민들에게는 물론 출향한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그는 요즈음 복지회관 도서실에서 잠자고 있는 책들을 들고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권장도 하고 배달도 해주는 일에 열성을 쏟고 있다. 이동 도서실을 운영하는 셈이다.

그의 그러한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젊은 시절 화약 기술자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토목 건설 현장의 발파 전문가로 유수한 건설 업체로부터 초빙을 받아가며 일을 했다고 한다. 그 때 천지를 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치솟던 찬연한 불꽃을 잊을 수 없다고도 했다. 그는 그 불꽃을 지금도 안고 사는 게 아닐까.

내가 그의 하는 일들을 조금씩 도우면서 우리는 술벗, 말벗이 되어갔다. 내가 그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가 하는 일에 대한 공감(共感)’ 때문이다.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이며 문화에 대한 관심, 말하자면 정신적인 가치 같은 것을 존중하는 그의 생각에 내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그는 나보다 수년 연장이시지만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데는 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술과 담소를 좋아하는 그와 나의 차이 없는 취향이 쉽사리 자리를 마주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그와 나는 이따금 술잔을 마주 놓고 담소에 빠지곤 했다.

지역의 문화를 어떻게 일구어 나갈 것이냐, 어찌하면 즐겁고 예쁘게(?) 늙을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 등이 주로 나누는 이야기지만, 그 사이사이에 장자(莊子)의 자유(自遊)도 이야기하고, “권하는 술잔을 거절 말게나 …… 자네 술 마시지 않는다 한들 살아있는 옛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며 이백(李白)을 읊기도 한다.

그렇게 담소를 하다 보면 밤은 언젠지도 모르게 이슥해지고, 술병은 훌쩍훌쩍 비워져 갔다. 문득 시계를 보고는 , 언제 이렇게 흘러갔지? 호계삼소(虎溪三笑)로구만, 하하하!”라며 호기롭게 웃었다.

여산의 혜원이 그의 옛 친구 도연명과 육수정이 찾아와 함께 놀다가, 두 사람이 돌아갈 때 그들을 전송했는데,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자기도 모르게 다시는 이 다리를 건너 산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고 맹서했던 호계의 다리를 지나쳐 버렸다. 혜원이 이 사실을 두 벗에게 말하면서 세 사람이 함께 손뼉 치며 크게 웃었다는 고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주봉지기천배소 화불투기반구다(酒逢知己千杯少 話不投機半句多)’라 하지 않습니까?”라며 응수한다. “술이 좋은 친구와 만나면 천 잔도 적고, 말이 의기가 투합하지 않으면 반 마디도 많다라는 뜻을 함께 새기며 웃는다. 술이 거나한 만큼이나 웃음소리도 컸다.

어느 날 그는 몹시 우울한 얼굴빛을 보였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을 마음 맞추어 해오던 오십 년 지기(知己)가 기어이 요양원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투병을 해오다가 집에서는 감당할 수 없어 시설에 의탁하러 간다는 것이다. ‘, , , 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다지도 아무런 선택권이 없이 당하기만 해야 하느냐며 긴 한숨을 지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더욱 즐겁고 아주 이~뿌게 살기를 애쓸 수밖에요.”

내일은 책을 배달해야 하는 날이라며 '오늘은 조매마(조금만) 하자'고 했다.

그야 술잔한테 물어 봐야지요.”하니 그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이다.

그의 술잔도, 책 배달을 나서는 일도 모두 젊은 시절 그가 터뜨렸던 불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201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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