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그리움에 산다

이청산 2016. 10. 5. 15:49

그리움에 산다

 

동창으로 스미는 새뜻한 빛을 받고 남창으로 배어드는 맑은 산새 소리를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를 반겨줄 아침 산책길이 그립다. 오늘 강에는 윤슬이 또 어떻게 반짝이고 둑에는 어떤 꽃들이 피고 있을까?

그 맑은 물을 보고, 함초롬한 꽃을 보면 지난밤의 혼곤하던 숙정도, 어지러웠던 꿈자리도 다 씻어낼 수 있다. 애송하는 시라도 하나 외며 걷노라면 언젠지 모르게 절로 다 씻겨 나가고 만다.

어쩌면 내 아침은 이 산책길을 위해 깨어나는지도 모른다. 얼른 세수하고 나선다. 두렁길을 지나 숲에 들어 간단한 체조를 하고 강둑에 서면 물은 어제처럼 맑게 흐르고 바람은 오늘 더욱 삽상하게 살랑인다.

분홍빛 무릇 꽃이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고, 샛노란 달맞이꽃도 씻은 얼굴로 인사말을 건넨다. 그래 밤새 달님은 잘 다녀가셨느냐. 다홍의 새붉은 유홍초도 조그만 입을 벌리며 무어라 재잘댄다. 물소리가 무슨 배경음악처럼 들려온다. , 저기 쑥부쟁이가 피었구나.

가을이 아름다운 건/ 구절초 마타리 쑥부쟁이 꽃으로 피었기 때문이다.……”(이해인, 가을이 아름다운 건)

걸음이 이리 가벼울 수가 없다. 구름 한 조각 내려앉아 그 한 쪽에 발가락 하나라도 얹을 양이면 구름 되어 훨훨 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씻은 몸과 마음으로 강둑 풀숲 길을 지나, 남빛 달개비꽃이며 한련초 하얀 꽃이 앙증한 두렁길을 걸어 집으로 든다. 이 길을 위하여 겹게 끓던 세월들을 무던 다독이면서 내 살아왔구나.

낮은 또 해거름 산을 그리워하는 시간이다. 가끔씩 창문을 열어 내다보는 푸르고 너른 들판이며 뜨락처럼 다가서는 숲정이도 가뿐하지만, 그 속에 몸 깊숙이 잠그는 일만 할까. 어서 해거름이 오면 좋겠다.

산속을 들면 그리 포근할 수가 없다. 더위도 다 씻어주고, 추위도 다 감싸준다. 어디 그뿐이랴, 아내의 잔소리도 말끔히 씻어주고, 세상의 낭자한 소식들로부터도 나를 아늑하게 보듬어준다. 산은 언제나 포근하고 넉넉하다.

드디어 해거름이다. 쌍지팡이를 가볍게 짚고 산을 오른다. 산은 푸나무의 자유 천지다. 저들 서 있고 싶은 대로 서 있고 눕고 싶은 대로 눕는다. 땅을 기어도 좋고, 하늘을 뚫어도 상관없다. 굽고 휘어져도 나무랄 이가 없고, 다른 것에 좀 기댄들 탓할 자가 없다.

그렇게 살다가 명을 다했다 싶으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선 자리에서 잦아들면 된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새싹으로 솟아나면 된다. 땅속으로 들어도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되고, 새로 태어나도 환호하지 않아도 좋다.

이런 산을 왜 들고 싶지 않겠는가. 어찌 아니 그립겠는가. 오늘도 그 그리움을 찾아간다. 그 자유 천지 속을 든다. 나도 문득 나무가 된다. 그 자유가 된다. 바로 서도 좋고 누워도 좋고, 굽어져도 싫지 않고 꺾어져도 아프지 않은 나무가 된다.

이 좋은 세상에 노래 가락이 어찌 없을까. 이 나무 저 가지에서 변주곡으로 울려 나오는 새소리, 명지휘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화음은 어찌 그리 맞추어 울리는가. 경쾌하고도 애달픈 가락들을 어찌 그리 잘 엮어내는가.

그 뿐이랴, 철 따라 피고 지는 꽃은 또 무엇인가. 올괴불나무, 생강나무 꽃이 봄소식을 들려 주는가 싶더니 진달래 산벚 꽃으로 익은 봄을 지나 으아리, 나리, 매화말발도리, 땅비싸리, 병꽃나무, 분꽃나무, 물푸레……. 눈여기노라면 꽃 아닌 풀이 없고 꽃나무 아닌 나무가 없다. 이 산을 오르면 내가 이 천지의 나무가 되고 꽃들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늘 그렇게 그리움으로 새날을 맞고 해거름을 기다린다. 그리고 내일이 그립다. 내일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내게 올까.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오늘 같은 날이라면 내일도 어여쁜 풀꽃이 만발한 곳으로, 자유의 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데려 가겠지. 그러나-.

내 살아가는 세상이 어찌 어여쁜 꽃들만 있는 곳이랴. 자유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기만 하랴. 나에겐들 기쁨과 슬픔이, 사랑과 미움이, 화평과 분노가 왜 얽히고설키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립다. 기쁨으로 새겨지는 슬픔을 위하여, 사랑으로 수놓아지는 미움을 위하여, 화평으로 가라앉는 분노를 위하여, 나는 늘 그립다.

이 그리움이 어제 오늘의 일일까. 늘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한 생애가 흘러가고, 또 한 세월을 살면서 그리움에 더욱 익숙해졌을 뿐이다. 누구는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박경리)이라며 감탄도 하고, 누구는 결단코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유안진)라며 결기도 세우지만, 난들 다르랴. 이 익은 그리움의 시절을 어찌 마달 수가 있으랴.

다만 그리움으로 살 뿐이다. 아침 고즈넉한 풀꽃 산책길이며 해거름 아늑한 푸나무 산길을 그리워하고, 새 꽃, 새 나무로 다가올 내일을 그리워하며 살 뿐이다. 얼굴 맑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 뿐이다.

, 오늘도 해거름 산에 오를 무렵이 반갑게 와 주었구나. 이 그리움으로 또 하루를 설레게 산다.(2016.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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