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세상은 모두가 꽃밭이다

이청산 2016. 4. 30. 21:45

세상은 모두가 꽃밭이다

 

강둑이며 산을 눈부시게 수놓았던 벚꽃들도 지고 초록빛이 점점 짙어지면서 봄도 한봄을 넘어서고 있다.

봄까치꽃, 큰개불알꽃아침 산책길을 걷는다. 두렁길을 지나 강둑길을 간다. 봄 한때를 현란하게 했던 강둑 벚꽃은 지고 없지만, 두렁길은 여전히 꽃들 천지다. 봄의 전령사가 되어 맨 처음 피어났던 잔잔한 봄까치꽃은 꽃다지, 봄맞이, 황새냉이, 제비꽃 들과 함께 아직도 온 두렁을 차지하고 있고, 하얀 꽃마리며, 붉은 현호색, 나도냉이, 개갓냉이 꽃들도 어울려 피고, 오늘 아침엔 조그만 주름잎꽃이 앙증스럽게 피어났다.

푸른 잎 우거져 가고 있는 벚나무 행렬을 따라 강둑길을 걷는다. 미나리냉이산괴불주머니가 손을 흔드는가 싶더니 하얀 미나리냉이, 말냉이 꽃이 함박웃음으로 반긴다. 애기똥풀은 언제 저렇게 흐드러졌나, 온 강둑을 노랗게 꾸미고 있다. 강물도 꽃들이 반갑다는 듯 윤슬을 반짝이며 축복의 눈짓을 보낸다.

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가장 먼저 산의 봄을 알렸던 양지꽃은 꽃잎을 오므려가고 있지만, 미나리아재비꽃이 자락 어귀에 서서 긴 목을 빼듯 가는 줄기 끝에 노란꽃을 달고 방긋 미소를 짓는다. 자줏빛 각시붓꽃이며 제비꽃, 보라색 구슬붕이, 노란 뱀딸기 꽃이 나부죽이 앉아 발길을 반겨준다.

새로 돋아나는 온갖 잎새들이 수줍게 손을 흔드는 길을 따라 산을 오른다. 초봄을 수놓았던 노란 생강나무꽃이며 작은 올괴불나무꽃이 진 자리에는 새잎이 돋아나고, 산을 붉게 물들이던 진달래꽃은 지고 연분홍 철쭉꽃이 가는 봄을 잡으려 하고 있다.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쑥쑥 솟아있다. 저 나무에 죽죽 술을 늘어뜨리고 다소곳이 달려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잘 읽은 수수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상수리나무꽃이다. 어찌 노랗고 붉은 것만 꽃이랴, 가지 위에 솜뭉치를 얹어 놓았는가, 철 아닌 물푸레나무꽃함박눈이 뚝뚝 내려앉았는가. 하얀 물푸레나무 꽃이다. 나무가 여물어 가지가 도리깨나 회초리로 많이 쓰인다는 물푸레나무가 이리 부드러운 꽃을 피우다니-.

산을 내려오는 길에도 온통 꽃이다. 짙은 분 향기를 풍기며 그리운 사람을 생각나게 하던 분꽃나무 꽃은 흐르는 봄을 따라 져가고 있지만, 매화말발도리나무, 고추나무가 하얀 꽃을 달고 하늘거리고 있다. 저 잎사귀 뒤에 숨은 붉은 꽃은 무엇인가, 꽃자루가 병을 닮았다고 붉은병꽃나무라 부르는 꽃이다.

가는잎그늘사초가는잎그늘사초가 별처럼 반짝이는 조그만 꽃을 피운 게 어제 같은데 꽃은 이미 지고 물오른 처녀의 치렁한 머리카락 같은 풀잎을 늘어뜨리고 있다. 둥굴레가 수줍은 듯 쌀알 같은 꽃봉오리를 달고 함초롬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꽃만 꽃이 아니다. 화살나무, 벚나무, 생강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굴피나무 들의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며 피어나고 있는 연두빛, 초록빛 저 잎사귀들의 갖가지 빛깔들도 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상이 너무나 찬란하여 외려 현기증이 일 것만 같다. 그 현기증으로 쓰러질지언정 이 봄이, 온통 꽃 세상을 이루는 이 봄이 얼마나 고마운가. 이 화사한 봄을 살고 있음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붉은 현호색

여섯 해째 한촌의 봄을 맞고 있다. 이 한촌을 살기 전에는 어디엘 가도 꽃들이 보이지 않았다. 신산한 삶의 일상 속을 아웅대며 살고 있던 그 때에는 산을 오르고 들을 거닐어도 그저 나무들뿐이고, 이름 모를 잡초뿐이었다. 그마저도 일상 속으로 다시 들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마는 것들이었다.

한 해, 두 해 한촌 살이가 쌓여가는 사이에 꽃들이 하나둘 씩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의 이름도 함께 찾아들면서 꽃 세상이 조금씩 보이는가 싶더니, 올봄은 더욱 눈부신 꽃 천지가 내게로 펼쳐져 왔다. 삶의 터를 따라 세상이 이리 달라 보이는가.

구슬붕이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이런 대목이 있다.

피에르는 이번에 여기에 오고 나서 먹고 싶을 때 먹고,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추울 때 따뜻하게 하고,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이야기하는 것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주인공 피에르가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 군대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적군에게 잡혀 포로 생활을 하면서 얻은 소회를 말한 것이다. 지금 나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이지만, 어느 곳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것은 같은 마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매화말발도리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피에르는 그 고마운 행복을 찾았다. 나타샤와 함께 꽃밭과 같은 세상을 살게 된다. 피에르가 포로 생활이라는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일상적인 삶의 고마움을 어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며, 나에게 신산했던 한 생애가 없었다면 이 한촌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인가. 한촌을 살지 않았다면 이 꽃 세상을 어찌 볼 수 있으며, 이 행복을 어찌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미나리아재비모두가 고마운 일이다. 나의 지난 생애도 한촌의 삶도 다 고마운 일이다. 사랑하면 보이는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꽃이요,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모두가 꽃밭이다.

내일 아침 산책길에는 무슨 꽃이 방긋 미소를 지을까. 내일 해거름 산길에는 또 어떤 꽃이 반가운 손을 흔들까. 세상은 모두가 꽃밭이다. 그 꽃밭 속을 살고 있는 나날이 행복하다.

그렇게 한 세상을 살고 싶다.(2016.4.27.)

 

※그림에 마우스를 올리면, 꽃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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