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고독한 가수

이청산 2016. 3. 23. 20:48

고독한 가수

 

우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와았던가아

어깨를 드러낸 여가수의 노래가 차 안 비디오 방송을 통해 구성지게 울려 퍼진다. 귀를 모아 조용히 음미하는 사람도 있고, 가벼운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는 사람도 있고, 노래의 곡조를 따라 흥얼거리는 사람도 있다.

지긋한 나이의 사람들이 모여 심신을 담금질도 하고 황혼 적적도 덜어보자며 몇 달에 한 번씩 옛것을 찾아나서는 나들이 길을 다녀오는 중이다. 이번에는 남쪽으로 길을 잡아 밀양으로 가서 영남루며 아랑각, 박물관, 표충비와 사명대사 생가지 들을 둘러보았다. 매화며 목련이 만발한 봄꽃도 완상하며 부지런히 발품을 팔다가 연홍 고운 노을 속의 붉은 해를 차창에 담고 귀로를 달리고 있다.

겨운 피곤에 눈을 감기도 하고, 몇몇은 소주잔을 나누며 담소하고 있는데, 기사가 편히 쉬시라며 노래 비디오를 틀어준다. 딴은 승객들의 취향을 배려하겠다는 듯 지난날 익히 부르고 듣던 흘러간 옛 노래 영상을 보여주었다. 여가수의 화사한 모습과 함께 노래가 흘러나온다.

가수가 등장하고 부르는 노래를 따라 가사가 줄줄이 새겨져 나오는데도, 노래하는 사람이 누구라고는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노래를 부를 뿐이다. 이름도 없는 가수인가. 이름을 대봤자 누군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일까. 가수가 누구든 노래만 들어달라는 듯했다.

그래도 그 가수는 노래의 정감을 살리려 애쓰며 열정을 다해 부른다. 가수 뒤에는 몇 사람의 밴드와 함께 무용수며 코러스 팀들이 노래의 흥을 돋우고, 화려한 조명이 무대를 현란하게 꾸며 나간다. 노래하는 무대가 갖추어야 할 건 다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단 한 가지 보이지 않는 게 있다. 관객이 없다. 모든 예술이며 표현활동에는 즐겨줄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 무대예술일수록 반드시 관객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저 무명의 가수는 누구를 향하여 무엇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가수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래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줄 카메라뿐일 것 같다. 가수는 카메라에 담긴 영상으로 자신의 노래를 들어줄 관객을 상상하며 열창을 다했을까. 비디오를 만들기 위한 공연이라 할지라도 가수는 고독하지 않았을까.

분주하게 돌아가는 카메라 앵글, 휘황찬란한 조명, 굉음의 반주 음악 속에서 고독을 느낄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래가 끝나고 환호해줄 관객이 보이지 않을 때도, 열심히 불렀지만 가수 아무개임을 알아줄 사람이 없을 때도 그는 고독하지 않았을까?

저 가수는 왜 노래를 부를까. 노래가 좋아서일까. 살기 위해서일까. 살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노래를 사랑하지 않고, 잘 부를 수도 없다면 어찌 저 무대에 설 수 있을까. 노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나 부르고 싶었기 때문에 어려움들을 무릅쓰고 저 무대에 섰을지도 모른다.

가수의 노래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찔레꽃, ‘번지 없는 주막도 부르고, ‘유정 천리홍도야 울지 마라도 부른다. 경쾌한 가락인가 싶더니 절규하듯 애절하게 부르기도 하며 절절한 정조로 노래에 몰입하고 있다.

25년간의 무명 생활 끝에 한 곡이 큰 히트를 치는 바람에 스타덤에 오른 가수가 있었다. 무명의 한 때가 너무 힘들어 가수 생활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때 가수는 포기해도 노래는 포기되지 않더라고 했다. 부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더라고 했다.

저 가수도 그러할지 모른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노래를 위해, 정녕 사랑하는 노래를 위해,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노래를 할 수 있고 무대가 있는 것을 마냥 다행으로 여기며 혼신의 열정을 다 쏟고 있을지 모른다.

문득 저 가수의 모습 위에 나의 모습이 겹쳐져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글을 왜 쓰고 있는가? 나의 글이라면 못 실어서 안달을 내는 유수한 문학지들 때문인가. 그 문학지에 실린 나의 글을 보고 감동 어린 갈채를 보내줄 수많은 독자를 위해서인가.

이 나이가 되도록 그런 무대와 관객들을 두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왜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가. 내 글을 아끼고 사랑해줄 문학지도 독자도 변변히 못 두고서도 글이 써지지 않으면 초조와 불안에 떠는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글을 쓰지 못한다면 삶의 의의조차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객쩍은 상념에 매달리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

나의 쓸쓸한 사념들 위로 저 무명 가수의 노래가 유려하게 애잔하게 흘러가고 있다. 입가에 소곳한 미소를 머금게도 하고, 눈시울에 아릿한 물기를 돌게도 한다. 미소와 물기 속을 그윽이 헤매는 사이에 차는 집을 다와 간다.

옛것을 찾아 심신을 추스르며 황혼 길을 돌아오는 오늘, 무명 가수의 열창을 들으며 삶의 사랑을 다시 생각한다. 사랑의 삶을 다시 새긴다. 저 고독한 가수가 노래하고, 쓸쓸한 내가 글을 쓰는 그 삶의 사랑을, 사랑의 삶을 돌아본다.

오늘 나들이를 두고 나는 또 무엇을 쓸까.(2016.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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