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두렁 꽃의 운명

이청산 2016. 5. 10. 20:15

 

두렁 꽃의 운명

 

봇도랑에 흐르는 물을 따라 봄이 흘러가고 있다.

봄의 전령사인 봄까치꽃이 두렁에 피어나면서 농부는 논을 갈기 시작한다. 황새냉이겨울잠을 깨우며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흙의 몸을 긁어준다. 흙이 가슴을 벌리며 활짝 기지개를 켠다.

흙의 호흡소리와 함께 두렁에서는 풀꽃들이 얼굴을 내민다. 꽃다지, 봄맞이, 황새냉이, 씀바귀, 제비꽃. 두렁은 꽃들의 놀이판, 잔치판으로 어우러져간다.

강둑에서는 벚꽃 망울 터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어느 날 아침 천지개벽하듯 꽃들이 일제히 활짝 피어나 강둑을 딴 세상으로 바꾸어놓았다. 그 세상도 잠시, 해사한 꽃비를 지우며 순식간에 강둑으로 내려앉는다. 그래도 두렁의 꽃들은 나날이 새뜻해져 갔다. 꽃마리

강둑을 현란하게 수놓던 벚꽃이 꽃비가 되어 날릴 무렵 보()의 문이 열리고 도랑에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겨울의 오랜 더께를 씻어내듯 봇물은 청랑한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논두렁의 꽃들은 그저 봄물이 반가운 듯 방실거리며 피어나고 있다.

농부들은 논을 써레질해 나갔다. 두렁에 하얀 꽃마리도, 자줏빛 제비꽃도 소복소복 피어나고, 주름잎꽃도 살포시 얼굴을 내밀고, 말냉이, 나도냉이, 개갓냉이, 뽀리뱅이도 줄기 끝에 노란 꽃을 피워 올렸다. 농부의 땀을 씻어주기라도 할 듯 하늘거리며 꽃술을 흔든다.

나도냉이한두 송이씩 피어나던 애기똥풀이 어느새 온 방죽을 노랗게 물들인다. 지느러미엉겅퀴가 빨간 꽃술을 속속 세우고, 지칭개도 대궁 위에 갈래 지어 꽃술 덩이를 품어낸다. 풀꽃들은 서로 어울리며 이 봄이 다하도록, 아니 언제까지라도 두렁을 두런두런 수놓을 것 같았다.

봇도랑의 물은 논으로 흘러들어 흙을 적셔나갔다. 농부들은 논 한쪽에 작은 두렁을 지어 못자리를 만들었다. 볍씨 넣은 모판을 못자리에 앉혔다. 비닐을 덮어 볍씨를 감쌌다. 며칠 뒤에 볍씨들은 아기 모가 되어 태어났다. 모가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커가는 모를 따라 두렁의 꽃들도 더욱 화사하게 피어났다.뽀리뱅이

이제 좀 있으면 온 논에 물을 넣고 모내기를 하게 될 것이다. 농부들의 일손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논을 다듬어 모 낼 준비를 해야 한다. 농부는 예초기를 어깨에 멘다. 모가 자라고 있는 두렁으로 간다.

기계에 시동을 건다. 칼날이 프로펠러처럼 돌아간다. 날쌔게 돌아가는 칼날을 두렁에 얹는다. 칼날이 요란한 굉음을 낸다. 그 소리는 차라리 비명이었다. 쓰러지는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낭자히 들리는 듯했다.

북쪽의 누가 불총을 쏘아 미운 사람을 흔적도 없이 처치해버리듯, 농부는 지느러미엉겅퀴봄까치꽃이며 주름잎꽃을 자취도 없이 스러지게 한다. 제비꽃은 제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는가. 꽃다지, 황새냉이 잘린 줄기가 논바닥으로, 봇도랑으로 흩어진다. 애기처럼 귀여운 애기똥풀 꽃도 잘린 줄기 끝에 달려 떠내려간다.

모를 내기 전에 풀씨가 논으로 날아들어 모의 자람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논두렁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단다. 북쪽의 불총쟁이도 저의 욕심을 채우는 데 훼방꾼이 될 것 같은 목숨들을 깨끗이 소제해 버렸던가.지칭개

우리의 순박한 농부들을 북쪽의 미치광이 불총쟁이에 어찌 빗댈 수 있으랴. 그 송구를 감히 범할 수 있을까만, 그러나 그 어여쁜 영혼들은 안타깝게 사라져갔다. 사라져가야 했다. 불총쟁이에게 죽어가야 했던 목숨들은 철천의 원한을 남겼겠지만, 두렁의 꽃들은 무엇을 남기고 산화해 갔을까?

농부들에게 원한에 찬 눈짓을 남기고 베어져 나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쩌면 저들은 두렁에 뿌리를 내릴 때부터 베어져 논바닥에 흩어지거나 봇도랑을 떠내려가다가 논들의 거름이 될 운명을 안고 피어났을지도 모른다. 주름잎하고한 땅을 두고 두렁에 뿌리를 내릴 때는 그 운명을 뚫어 가늠했을지도 모르겠다.

명년 봄을 기약하며, 제단에 몸을 바치듯 기꺼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그렇기에 봄이 오면 언제나 보란 듯이 또 피지 않는가. 언제 무슨 일이 있기나 했냐는 듯 여상스레 피어나지 않는가. ‘밟으면 밟을수록 선명한 색을 드러내는 페르시아의 명품 카펫처럼 다시 화사한 꽃으로 솟아나지 않는가. 두렁 꽃들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아침이면 늘 반짝이는 미소로 맞아주던 풀꽃 두렁 산책길을 걷다가 오늘은 말끔히 청소(?)된 두렁길을 걷는다. 지난 꽃들의 형해를 그리며 잠시 숙연에 젖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너울너울 떠가고 있다.

봇도랑 물이 맑게 흘러간다. 흐르는 물 따라 봄이 흘러가고 있다. 저 흐르는 물은 또 내년 봄을 데불고 흘러올 것이다. 또 봄의 꽃들을 데불고 올 것이다. 봄까치꽃도, 꽃다지도, 봄맞이꽃도, 제비꽃도 데불고 올 것이다. 그렇게 새 세상을 가져올 것이다.

뻐꾸욱-. 뻐꾹새 소리가 먼 여운을 그린다. 뻐꾹채가 연분홍 꽃술을 올올 피워낸다.(2016. 5. 8)

 

※ 그림 위에 마우스를 올리면, 꽃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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