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산에는 꽃이 피네

이청산 2016. 4. 3. 11:37

산에는 꽃이 피네

 

산이 언제 이렇게 달라졌는가. 늘 오르는 산인데도 오늘 산은 어제 그 산이 아니다. 빛도 새롭고 소리도 새롭다. 봄이 오려니 이리 쉬 오는가. 봄만이 산을 이리 새롭게 바꾸는 것은 아니다. 철이면 철마다 나고 지는 것들과 함께 빛깔이며 자태를 바꾸어 가는 모습들이 언제나 새롭다. 그 새로움이 늘 내 발길을 산으로 이끈다.

오늘은 봄빛 속을 오른다. 산자락 초입에 맨 먼저 맞이하는 것은 마른 풀 사이로 노란 꽃잎을 앙증맞게 내밀고 있는 양지꽃이다. 봄의 모양이 있다면 이 꽃 같을까. 솔잎이 한결 새뜻하다. 정갈하게 빗질한 빛깔 같다. 봄 나무에 물오르듯 내 몸에도 생기가 솟는 것 같다.

엊그제 망울이 맺혔는가 싶더니 어느새 꽃을 피워낸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생강나무꽃 노란빛과 어우러져 빛깔의 향연을 벌이며 산색을 설레게 칠하고 있다. 나에게도 저런 빛깔의 시절이 있었을까. 뜬금없이 살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왜 들까.

참나무 소나무, 큰 나무들 속에서 넝쿨 같은 가느다란 가지에 잔잔한 꽃을 달고 있는 올괴불나무. 하늘의 별이 밤의 빛내기를 위해 숲을 찾아 낮을 잠시 쉬러 온 것 같다. 문득 가슴속에 별빛이 들어앉는 것 같다.

이제 곧 생명의 자양으로 돌아갈 깔린 낙엽들이 정겹다. 융단 같은 감촉을 전류처럼 전해온다. 저 새소리, 무어라 무어라 지껄이는 저 소리들이 마치 손주 놈들 종알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귀에 익은 한 가락 동요 같기도 하다.

, 이 숲정이에 살기를 참 잘했다. 저들 중에 어느 것 하나 미운 것이 있고, 무엇 하나 나를 미워하는 게 있는가. 저들 어느 것이 내 마음을 아리게 하고, 어떤 것 하나 저들을 아프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정밀한 숨결만이 감돌고 있는 이 숲에서-.

돌아보면 내 살아온 길에 따뜻하고 소담스러운 삶도, 그 행복을 느꺼워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때로는 할퀴이고 찔린 생채기를 안고 긴 밤을 남 몰래 앓던 적도 없지 않았다. 그 아픈 일들 모두 내 삶의 어쭙잖은 행보 탓이었겠지만, 시시로 새겨지는 아린 기억들이야 하릴없는 일이다.

모든 것은 어차피 흘러가고 지나가는 것, 그 흐름 속에 감기어 한 세월이 가고 속진을 떨쳐 보겠답시고 물이 있고 산이 있는 곳을 찾아와 바람과 함께 살고 있다. 아침이면 강둑을 걷고, 해거름이면 산을 오르는 것을 내 살아있음의 오롯한 증거로 삼고 있다.

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어제 안 보이던 꽃들이 건네 오는 해맑은 미소에 취하며 오르다보면 새소리가 무슨 찬가마냥 맑고 푸른 음표를 비처럼 뿌려댄다. 이 나무도 안아보다가 저 나무에 등을 비벼보다가, 향하고 싶은 발길대로, 벌리고 싶은 걸음나비대로 발을 옮긴다. 이 숲에서야 무엇이 내 걸음을 시비하랴.

나무인들 어찌 곧게 뻗을 수만 있는가. 굽고 휘어진 나무들, 때로는 기웃대고 비비대는 이웃이 있을지라도 나무는 나무를 탓하지 않는다. 서로 보듬고 의지하며 지낼 뿐이다. 어쩌면 볕을 더 많이 받을까 서로 다투어 솟기도 하지만 결코 남을 해코지하지 않는다. 선의의 경쟁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인간의 적은 언제나 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에겐 사랑과 평화도 있지만, 시기와 배척도 있고 미움과 투쟁도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 입는 상처는 늘 인간에게서 입는 것이다. 그러나 산에 들면 언제나 마음이 안온하다. 원망도 시기도 없는 이들의 세계가 편안하다. 다툼도 적대도 없는 이들의 세상이 따뜻하다.

산에는 언제나 꽃이 핀다.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핀다고 했던가. 세상의 모든 티끌을 다 떨치고 피기 때문이다. 미움도 다툼도 다 넘어서서 피기 때문이다. 저만치 피는 꽃에 내 비록 쓸쓸해질지라도, 그 쓸쓸함마저 사랑이 되게 하는 것이 저 꽃 아닌가. 산에 들면 몸도 마음도 다 꽃이 된다. 꽃으로 핀다.

새가 산에 깃들이는 것도 꽃이 좋아서라 했던가. 어찌 새뿐이랴. 세상 모든 것은 산에 피는 꽃이 좋아, 몸과 마음에 피는 꽃이 좋아 산으로 든다. 나도 산으로 든다. 오늘은 목 놓아 김소월의 산유화를 외고 싶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지는 것이 곧 피는 것이 아닌가. 피는 것이 곧 지는 것이 아닌가. 나도 산꽃 되어 갈 봄 여름 없이, 여한 없이 피고 싶다. 그리고 갈 봄 여름 없이, 미련 없이 지고 싶다. 그렇게 피다가 그렇게 지고 싶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꽃 지네, 꽃이 지네(2016.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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