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벚꽃이 피는 날

이청산 2016. 4. 13. 22:16

벚꽃이 피는 날

 

오늘도 한촌의 아침 강둑 산책길을 걷는다. 무슨 전쟁이 발발한 줄 알았다. 여기저기서 팡팡거리며 터지는 소리, 강둑이 온통 수라장이다, 이런 황홀한 전쟁터가 있는가. 이런 현란한 수라장이 있는가.

겨울이 꼬리를 쉬 거두어가지 않아 모든 것을 움츠리게만 했다. 빈 가지만 찬바람에 일렁일 뿐, 언제 꽃망울을 맺을까, 꽃이 피기나 할 수 있을까, 강둑을 걸을 때마다 조바심에 쉽사리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 별안간 세상이 개벽해 버렸다. 언제 어디에다가 그런 화심을 숨겨 놓았던가. 여기 저기 이 나무 저 나무에 터지는 꽃들이, 빈혈증이라도 치밀 듯 동공을 어질어질 캄캄하게 한다. 차라리 눈을 감는다. 무슨 총성 같은 소리만 무참하게 들리는 것 같다.

어느 시인은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벚꽃을 보고 귀가 먹먹하도록’(김종해, ‘모두 허공이야’) 떨어진다 했지만, 오늘 꽃 터지는 소리 듣고 있는 내 귀가 마치 포성 맞은 고막처럼 먹먹하다. 다시 눈을 뜬다. 해사하고 화사한 꽃들의 행렬, 행렬. 세상이 온통 꽃 천지다.

무엇에 깊이 홀려버린 듯한 정신을 겨우 수습하여 꽃들을 본다. 가지가지에 순전히 꽃, 꽃이다. 다시 본다. 불현듯 피었을지언정 어찌 졸창간에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랴. 치열한 생명 작용을 거쳐 풀린 날을 기다려 이때다 싶어 터뜨렸을 것임은 물론이겠다.

꽃 터뜨리기를, 터뜨릴 때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가지고 줄기고 둥치고 터뜨릴 곳이 있다 싶으면, 가늘고 굵은 데, 높고 낮은 곳을 가리지 않고 터뜨렸다. 그 터뜨리기를 위해 온 겨울을 살아온 듯, 살찬 설한풍을 견뎌온 듯 화창한 볕을 기다려 화산이 폭발하듯 터뜨려 버렸다.

오직 꽃이다. 잎도 없이 오로지 꽃이다. 저 줄기 저 둥치는 무엇인가? 포화에 파산된 아스팔트 길바닥 같기도 하고, 터지고 갈라진 늙은 농군의 손등 같기도 하다. 둥치 어느 곳은 마르고 썩어 휑해져 버렸다.

새봄 새 단장이야 무엇에 쓰랴, 오직 꽃이다. 세상 미련은 죄 떨치고 오로지 꽃만을 위하여 온 마음을 모았다. 뜨겁고도 무섭게 마음을 쏟았다. 저 현란하게 피워낸 꽃이란 바로 오로지한 집심의 산물이다. 열정의 현현이다. 그 힘으로 격렬한 탄성 같은 꽃을 피워냈다.

그 강렬한 집심과 열정 앞에 선다. 나는 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무엇에 오로지 마음을 모았던가, 그것을 향해 얼마나 뜨거운 열정을 바쳤던가. 애써 이루어낸 조그만 것에 미소를 지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걸 두고 나의 오롯한 집심이라 할 수 있을까.

돌아보면 내 삶이란 세상의 물결과 바람결을 쫓아 내 숨결 고르기만을 바둥거려 온지도 모르겠다. 집심이 아니라 미봉이었다 할까. 그저 일이 어려워질 때면 그 걸 헤쳐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던 허허로운 기억들이 돌이켜질 뿐이다.

그러했을진대 어찌 저 꽃 같은 찬란한 삶을 피워낼 수 있었으랴. 저 꽃 앞에선 내 모습이 작고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저 눈부신 꽃들로 황홀경에 취해 있다. 이 꽃 천지 강둑길이 모두 내 것인 마냥 도취해 있다.

이 한촌의 강둑에서 오늘 꽃 세상을 얻은 것이, 이 꽃 세상 속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나의 찬연한 개화라 할까. 이 개화를 위해 한 생애를 다 바쳐 온지도 모른다. 세상을 그리 바둥거리며 살아온 것도 오직 오늘 이 꽃 세상을 위한 나의 집심이요, 집념이었던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 개화에 이르기까지는 회오의 순간들도, 불면의 밤도 없지 않았다. 오늘 같은 꽃 세상에 대한 소박하고도 질긴 소망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그 신산한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오늘의 저 현란한 꽃 행렬은 곧 내 개화의 성취이기도 하다.

봄은 전쟁처럼 온다고도 하고, 꽃은 혁명처럼 핀다고도 했던가. 저 꽃이 전쟁의 승리자요 혁명의 성공자라면, 나도 내 삶의 승리자요, 성공자다. 이 한촌에서 바람소리, 새소리와 더불어 저 꽃과 함께 살 수 있는 한 나는 영광스러운 승리자다.

무엇이 세상에서 영원하랴. 피어난 꽃은 지기 마련, 저 꽃도 머잖아 질 것이다. 하롱하롱 질까, 하르르 하르르 질까? 필 때 전심을 다하여, 전력을 다 바쳐 피었던 것처럼 질 때도 미련 없이 후회 없이 질 것이다. 어느 시인은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형기, ‘낙화’)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도 했다.

나의 개화도 꽃잎을 떨어뜨려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저 꽃처럼 축복의 꽃비가 되어 내리고 싶다. 봄꽃 찬란한 한촌 생애의 아름다운 기억을 안고 기껍게 내려앉고 싶다. 저 꽃잎처럼.

벚꽃이 피는 날, 느꺼운 삶의 아침 강둑 산책길을 걷는다. 내 찬연한 개화의 행렬 속을 가뿐한 걸음으로 걸어 나간다.(2016.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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