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계절의 바뀜을 보며

이청산 2015. 11. 15. 20:02

계절의 바뀜을 보며

 

가을이 가고 있다. 가는 가을을 전송이라도 하려는 듯 가을비가 자분자분 내리더니, 강둑의 벚나무며 뒷산 나무들의 단풍 빛이 한결 더 새뜻해졌다. 노란색, 붉은색, 황갈색의 잎사귀들이 명도와 채도를 달리 하면서 온 강둑이며 산을 황홀하게 휘덮고 있다.

저 빛깔들은 무엇인가. 한 계절의 종언을 고하는 찬연한 뒤풀이일 것도 같고, 오는 계절을 영접하기 위한 거룩한 향연일 것도 같다. 모든 것이 변하고 바뀔 때 저리 찬란한 향연으로 가고 올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계절의 바뀜을 알리는 저 빛의 잔치를 보면서 나의 삶을 돌아본다. 나는 지금 어느 계절을 살고 있으며 어떻게 바뀌어왔고, 또 어떻게 변해 갈 것인가.

어느 날 신문을 보노라니 지역별 평균 기대수명이라는 게 나 있는데, 내가 사는 한촌 지역의 기대 수명은 80.43세로 나와 있다. 나도 평균 수명 정도는 산다고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삶의 계절은 어디쯤일까.

사람의 삶을 수치로 단락 지울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계절의 순환에 맞추어 한생을 나누어 볼 수 있음직도 하다. 예컨대, 태어나서 10대까지는 봄이요, 30대까지는 여름이요, 50대까지는 가을이요, 그 이후로는 겨울로 보면 어떨까.

나무에 새움이 터서 잎이 파랗게 돋아나는 시기, 그 잎이 신록을 이루며 무성해지면서 열매를 준비하는 시기, 열매가 맺히면서 잎이 뿌리로 돌아가는 시기, 모든 것을 떨치고 지난날을 돌아보며 새로운 세상을 예비하는 시기의 자연 질서와도 무관치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계절은 분명 겨울이다. 겨울 중에서도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를 맞이할 무렵의 중동지절(仲冬之節)이라 할까.

다시 돌아본다. 나의 지난 계절들은 어떠하였으며, 저 강둑과 산의 황홀한 향연 같은 찬연한 단풍 빛이 나에게도 있었던가.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던 간난과 신산이야 어찌 없었을까만, 그런대로 싹을 틔우고 잎 피우면서 살아왔던 봄, 딴은 열심히 삶을 가꾸어 보리라며 기운을 돋우던 여름, 조그만 보람도 느끼면서 한생을 갈무리하던 가을 들의 계절을 겪어온 것 같기도 하다.

저 강둑과 산의 황홀한 향연의 빛깔을 다시 본다. 어쩌면 저것은 삶의 한 장엄일지도 모른다. 나무는 가을이 깊어지면서 가지와 잎자루가 만나는 곳에 떨켜[離層]라는 세포층을 만들어 겨울나기와 새봄 맞을 준비를 한다. 그것으로 줄기가 품고 있는 수분의 발산을 막아 겨울을 나게 하고, 잎은 줄기를 위해 기꺼이 말라가다가 떨어져 뿌리의 자양이 되는 것이다. 잎은 마르면서 황홀한 빛깔이 되어 한때를 찬란하게 장식하고는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새 삶을 예비하는 것이니, 실로 장엄한 삶의 반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나도 떨켜 뒤의 나뭇잎처럼 한 생애를 기꺼이 마감했다. 저 단풍 빛 같은 찬연은 없었을지라도 별 큰 허물이 없이 한 세상을 마무리하고, 새 삶의 자리를 찾아 떠나왔다. 그렇게 가을을 뒤로 하고 겨울로 왔다.

나무가 떨켜와 낙엽으로 겨울을 예비하듯 나는 무엇으로 겨울날 채비를 하였던가. 소음으로 번잡한 인위의 거리를 떠나 바람소리 한가로운 무위의 세상으로 드는 일이었다. 한 생애를 마감하던 다음날부터 푸른 산이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곳, 오늘처럼 저 찬란한 단풍 빛이 보이는 작은 마을 고샅의 한 자리가 내 보금자리가 되었다.

저 나무들은 이제 나목이 되어 바람결이며 새소리를 보듬으면서 때로는 해사한 설화를 피우기도 하며 새봄을 맞이할 생명 작용을 부지런히 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봄이 오면 움 틔우고 싹 피워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겨울을 어떻게 나고 있는가. '우리 인생에서 노른자의 시기는 65세에서 75세까지'라는 어느 노철학자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지금 나의 겨울은 따스하다. 일찍이 느끼고 누려본 적 없는 편안함과 행복감을 지금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칠순 넘어서 열렬한 사랑을 했고, 문학만이 아니라 자연과학 전반에까지 왕성한 지적 열정을 보였던 괴테를 따를 순 없다고 하더라도, 읽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고, 쓰고 싶은 것을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이 겨울의 삶이 좋다. 다만 나타와 재주를 넘어서기에 애써야 할 따름이다.

저 나무들은 다시 잎 돋고 꽃 피는 봄을 맞이할 것이지만, 내 겨울의 뒤끝에서 맞아야 할 것은 이승을 등에 진 날일 것이다. 장자(莊子)처럼 죽음을 앞에 두고 춤추고 노래하는 초연을 터득하지는 못할지라도, 자연에의 귀의로 삶의 월동을 준비했듯 죽음도 자연이라는 사념 앞에서 그 또한 계절의 바뀜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겠다.

내 아직 이생을 사는 사람이라 인위의 모든 때를 다 벗었노라 할 수 있을까만, 무엇에고 의지함 없이 누리고 있는 내 자유만으로도 나는 삶의 따뜻한 겨울을 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놓지 못할 인위의 끈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그리움일 뿐이다. 설령 내 자유가 얽매이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만은 놓고 싶지 않다. 무엇을 사랑하고 누구를 그리워하든 그 걸 놓는 순간이 바로 나의 세상을 다하는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 단풍 빛 찬란한 계절의 바뀜을 보며 내 삶의 계절을 다시 음미한다. 참 따뜻한 계절 속을 내 살고 있다고-.(201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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