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그런 사람이 그립다

이청산 2015. 10. 19. 18:18

그런 사람이 그립다

 

조그만 동네에 오순도순 모여 사는 이웃들은 어떤 일가붙이보다 더 가깝고 정답게 지내고 있다. 삶의 연륜이 비슷한 이웃이 있다면 살붙이보다 더 살가운 친구가 되어 세상 누구보다 더 가까이 지낼 수 있다.

이웃에 그런 친구가 하나 있다. 날이면 날마다 얼굴을 대하면서 마음과 생각을 모두 터놓으며 지내는 사이였다. 그 친구는 자신의 오해가 까닭이 되어 어느 이웃과 크게 다투었다. 아주 앙숙이 되어버릴 정도까지 갔다. 다툼은 오래도록 풀리지 않고 있다.

친구의 그런 모습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를 썼으나 잘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말이 오가는 사이에 나하고도 감정이 상할 지경에 이르렀다. 친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무력감이 자괴감에 젖게 했다.

그 무렵 뉴스에서는 희한한 사건 하나가 큰 화젯거리로 보도되고 있었다. 보도 내용을 간추리면 이러하다.

 

특수강간죄로 징역 15년 및 치료감호를 선고 받아 감호소에서 형 집행 중인 성폭행범이 감호 직원이 호위하여 병원에 신병 치료를 받으러 나왔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직원을 따돌리고 탈주했다. 이 탈주범은 도피 자금 마련을 위해 어느 상점에 침입하여 20대 여성 업주를 망치로 윽박질러 상점 창고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 범행 직후 피해 여성은 범인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는데, 자신의 괴로운 심경을 토로하는 범인을 설득하여 자수를 결심하게 했다. 범인은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자수 의사를 밝히고, 도주한 지 28시간 만에 피해 여성과 함께 택시를 타고 경찰서에 가서 자수했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이 기사를 보고 들으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범인은 탈주의 와중에서 왜 또 성폭행 범죄부터 저질렀을까? 범행 후에는 어떤 정신 상태로 피해 여성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을까? 피해 여성도 어떤 마음으로 끔찍한 범죄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어떻게 설득하여 자수를 결심하게 했을까? 어떤 생각으로 범인과 함께 경찰서까지 갔을까? 공포와 위기 앞에서도 범인과 침착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용기와 지혜며, 삶의 경륜도 그리 깊지 않을 20대 여성이 그 흉악범을 자수하게 한 그 설득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범인은 성적 선호 장애경계성 인격 장애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성적 선호 장애란 성적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는 정신장애로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면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판단과 결정이 잘 안된다고 하며, 경계성 인격 장애란 정서, 행동, 대인관계가 매우 불안정하고, 감정이 정상에서부터 우울, 분노를 오가며 기복이 매우 심한 인격 장애로, 자제력이 부족하고 충동적, 폭발적이며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성폭행 범죄를 저질러 수감 중인 범인이 탈주하여 다시 성폭행을 저지르고, 피해자의 설득으로 자수하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행위는 그러한 장애의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실로 예측할 수 없는 행동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범인을 설득한 20대 피해 여성은 어떤 사람일까? 보도에서는 이 여성의 신상에 관해 일절 말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이 여성의 행적을 더듬어 보노라니, 문득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말한 설득의 세 가지 요소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가 떠오른다.

에토스는 명성, 신뢰감, 호감 등 설득하는 사람이 지닌 인격적인 측면으로 설득 과정에 60% 정도 영향을 미치며, 파토스는 공감, 경청 등으로 친밀감을 형성하여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해 마음을 움직이는 감정적 측면으로 30% 정도 영향을 미치고, 로고스는 논리적 근거나 실증적 자료 등을 제공하는 이성적인 논리를 말하는 것으로 10%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로써 보면 이 여성은 큰 명성을 가진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그 흉악범의 눈에도 믿을 수 있고, 좋은 사람으로 비쳤던 것 같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점점 더 좋은 감정을 쌓아갔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흉악범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했을까? 범인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할 때 진심으로 공감하고 경청해주는 데서 대화가 이어질 수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해 점점 더 신뢰와 호감이 깊어져가는 선순환이 계속되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차를 함께 타고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여성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대방에게 믿음을 줄 수 있고, 남의 말을 귀담아 잘 들으며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고, 그리하여 더욱 큰 호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인격적인 바탕을 가진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다. 그 믿음과 호감이 흉악범의 마음을 열어젖힌 것이다. 순순한 자수로 마음을 열게 하기까지는 따뜻한 감성과 더불어 냉철한 이성도 함께 작용했을 것임은 물론이겠다.

그 여성을 떠올리며 그려본다. 그런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울까. 그 삶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로울까. 그런 세상은 시기와 질투도 없을 것이고, 미움도 다툼도 없을 것이고, 오직 화해와 관용과 사랑만 넘쳐날 것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나라 어디에 대립과 쟁투가 있을 것이며, 세계 어디에 파괴와 전쟁이 있을 것인가.

오늘도 뉴스는 온갖 범죄와 싸움과 폭력과 분열의 소식들을 낭자하게 전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만의 세상은 한갓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런 사람이 그립다.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그립다.

나는 친구에게 어떤 사람이던가. 어떻게 듣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저 맑고 푸른 하늘이 오늘 따라 너무도 눈부시다.(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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