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가을 들판에서

이청산 2015. 10. 26. 20:42

가을 들판에서

 

한로도 지나 벌써 상강이다. 들판이 온통 누런 금빛으로 출렁이는가 싶더니 바야흐로 벼 베기가 한창이다. 어제는 저 집, 오늘은 이 집, 가을 손길이 분주하다.

벼가 고개를 묵직이 숙이고 서있는 논머리를 조금 쳐놓으면 트랙터가 와서 삽시간에 뚝딱해치우는 벼 베기지만, 트랙터가 쏟아내는 알곡을 말리고 건사하여 조합으로 낼 일도 바쁘다.

이 한 알의 알곡을 위하여 얼마나 많이 노심하고,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왔던가. 땅을 갈고, 썰고, 심고, 가꾸고 하는 사이에 쏟은 손길은 몇 번이고, 철은 또한 몇이나 바뀌었던가.

요즈음이야 아무리 기계가 다 해낸다 해도 이것들을 위해 쏟아야 할 자잘한 일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죽하면 여든여덟[八十八] 번 손이 가야 쌀[]이 된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벼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지 지금처럼 벼를 벨 철이 되면 가꾸기에 정성을 들인 논과 그렇지 않은 논, 정성을 많이 쏟은 논과 그렇지 않은 논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하기로 손문난 사람은 이 씨 부부다. 그들은 봄철 논을 갈 때부터 벼가 다 익은 지금까지 잠시도 눈길, 손길을 떼지 않는다. 땅을 썰어 적절히 물을 대고 씨를 넣은 모판으로 못자리를 만들어 모가 자랄 때까지 보듬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앙기로 심은 모지만 논을 두루 살피며 기계가 살뜰히 심지 못한 곳에는 정성스레 보식을 한다. 피가 돋지 않을까, 자람이 더디거나 웃자라는 것은 없을까. 비료를 주고, 피를 뽑고, 살충제를 치고, 물을 대기도 하고 빼기도 하며 갖은 정성을 다 모은다.

지금 보면 이 씨 논의 벼가 모두 맞춘 듯 고르게 자라있을 뿐만 아니라, 빛깔도 제일 좋고 알곡들도 모두 튼실하고 토실하다. 역시 이 씨 논이야! 보는 사람 모두 찬탄을 금치 않는다.

농사를 낫게 짓던 어느 이웃이 몇 마지기를 떼어 남에게 주었는데, 그것을 받은 사람의 논에는 피며 잡풀이 벼들 사이 곳곳에 불쑥불쑥 나있다. 젊은 사람에게 주었더니 농사를 짓는 법을 잘 몰라 그럴 거라며 보는 이들이 혀를 찼다.

논은 우리 동네에 두고 멀리 사는 사람이 있다. 모를 심은 이후로는 언제 물을 대고, 언제 걸우는지, 동네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벼가 크는 모습이 들쑥날쑥할 뿐만 아니라 벼논인지 숲정이인지 모를 정도로 피며 잡풀은 물론이고 도꼬마리 같은 것들도 볼썽사납게 돋아나 있기도 하다.

논임자는 그 모습들을 보기나 했을까. 그뿐 아니다. 어느 날 논을 보니 센 바람이 친 일도 없는데 태풍 지난 자리처럼 벼와 잡풀들이 마구 엉켜 논바닥 자욱이 쓰러져 있다. 알고 보니 논바닥이 말라 고라니가 와서 한참 해찰을 부리고 간 자리라고 한다. 물 관리를 제때 하지 않은 탓이다. 그 논도 벼 베기를 했다. 쓰러진 곳은 버려두고 쓸 수 있는 것들만 대충 베어냈다. 무엇을 얼마나 거두었을까.

어찌 벼들 만이랴. 이 가을 들판에서 사람살이를 돌아본다. 저 논들을 가꾸는 것도 저마다의 삶을 걸우는 일과 무엇이 다르랴. 농군에게는 저 벼가 곧 자신의 삶이겠다. 저들을 알뜰히 가꾸는 게 바로 자신의 삶을 충실히 걸우는 일이 아니랴.

뉴스를 보고 듣노라면 자신의 처지를 굳건히 딛고 일어서 삶을 성실하게 가꾸어 보람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들의 성공담도 있는가 하면, 잔혹한 범죄의 주인공이 되어 끔찍한 뉴스의 중심에 서는 사람도 있다.

오늘 신문에도 세계 최고의 피아노 콩쿠르에서 1등으로 입상하여 우리나라 음악계의 최대 경사를 이루어낸 약관 청년의 이야기를 톱뉴스로 전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을 불행에 빠뜨린 사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는 수사의 압박을 못 견뎌 음독 자살해버린 어느 범죄자의 이야기도 보도하고 있다. 이렇듯 확연히 갈라지는 삶의 빛과 그림자가 어찌 오늘 신문에 뿐이랴.

가을이 가고 있다. 벼들이 잘 영근 이 씨의 논은 모레쯤 벼를 벨 것이라 한다. 이 씨의 환한 얼굴이 그려진다. 가을은 이 씨의 빛 밝은 얼굴에서도 흘러가고, 흉작 벼를 거둔 논임자의 모습에서도 흘러간다. 가을의 모습은 가을의 몫이 아니라 사람의 몫일뿐이다.

내 삶도 가을을 넘어서고 있다. 나는 이 계절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가 마주해야 할 가정사며 세상일들에 대해 아직도 노심을 벗지 못할 일들이 없지 않고 보면, 이 씨가 논에 온갖 정성을 쏟던 것처럼 그렇게 내 삶을 공들여 가꾸어 오지를 못한 것 같다.

살아오는 사이에 작은 미소나마 따뜻하게 품을 수 있었던 일들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내 생애를 두고 난 이런 것을 이루었노라며 마뜩이 꼽을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다. 잡초가 숭숭한 누구네 논처럼 삶의 논을 참 덩둘하게 건사해온 것만 같다.

그러나 어쩌랴. 내 그런 모습을 담은 가을도 긴 그림자를 드리워 가고 있다. 곧 겨울이 올 것이다. 이제 내가 무엇을 더 걸우려 욕심낼 수 있을까. 겸허히 가을을 보낼 일이다. 저 텅 비어갈 들판처럼, 그래서 봄을 예비한 겨울을 맞이할 저 들판처럼 모든 것을 비울 일이다. 내게 올 봄은 마냥 없을지라도 허심으로 살 일이다.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없을지언정 해가 되지 않는 삶을 살게나마 애쓸 일이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오늘, 오직 바라는 게 있다면 내 빈 마음의 논 자락에 다소곳한 사랑 몇 점 따뜻이 들어앉아있으면 좋겠다. 내 삶이 허여되는 날까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가을 들판에서-.(201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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