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그 가을의 분주와 풍요

이청산 2015. 11. 27. 08:30

그 가을의 분주와 풍요

 

지난 가을은 갈바람에 출렁이는 황금들판의 벼이삭처럼 풍요하고도 분주했다. 즐거운 비명이란 이런 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봄부터 가꾸어온 분주였다. 가을 초입의 성대한 잔치를 위하여 틈틈이 모여 기량을 닦아나갔다. 해마다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콘서트도 대비를 해야 하지만, 몇 곳에 초청도 받아놓은 터였다.

연찬을 더해 갈수록 회원들의 열정은 점점 달아올랐다. 정기 콘서트를 위해 이십여 회의 연찬 모임을 진행하는 사이에 낭송 전문가인 회장님은 다리를 다쳐 절면서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회원들을 지도해나갔다. 성대하게 열릴 낭송콘서트가 기대되기도 했지만 시를 외고 낭송하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 우리가 시가 되고, 시가 우리가 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콘서트의 날이 다가왔다. 가을이 수줍은 얼굴을 내밀던 맑은 토요일 오후 4시 어느 문화센터 작은 극장, 관객이 얼마나 찾아들까. 보아주고 들어줄 관객이 없다면 땀 흘려 애써온 성과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한두 사람씩 모여들던 관객들이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나가는 사이에 객석을 모두 메웠다.

주제는 시는 사랑을 타고’,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을 여는 시로부터 시작하여 독송, 듀엣 낭송, 윤송, 수필 낭독, 시극. 시 퍼포먼스로 풀어나갈 때, 한 순서 한 순서가 끝날 때마다 해일 같은 환호와 갈채가 쏟아졌다. 그 환호와 갈채를 위하여 우리는 봄부터 그리 뜨거운 땀을 흘려 온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우리에게 덤의 행복이었다. 아름다운 시를 외어 가슴에 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 위에 쏟아진 갈채는 우리를 더욱 황홀한 행복에 젖게 했다. 시가 이토록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임을 왜 좀 더 일찍 몰랐을까.

시를 사랑하고 낭송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우리의 삶과 함께 이웃들의 삶도 아름답게 고양시켜 보자며 모임을 만든 지 네 해 만에 세 번째 개최한 콘서트였다. 찬연한 행복을 안고 정기 콘서트를 즐겁게 끝냈지만,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부산의 어느 정신장애인을 위한 복지단체에서 문학콘서트를 개최한다며 참여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정신장애인의 건강한 사회 복귀를 돕고, 정신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개최하는 문학콘서트였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시와 수필로 낭송, 낭독, 윤송을 구성하여 한 달여 준비한 끝에 부산행 열차를 탔다. 엄중한 사명이라도 띠고 가는 길인 것처럼 두근거렸다.

부산시민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콘서트에는 초청된 우리 회원들 말고는 출연자들도 관객들도 모두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들이었지만 고아한 정서세계를 향한 열망은 비장애인들보다 더욱 뜨거운 것 같았다. 우리가 그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렬한 갈채가 오히려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콘서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걸음 속으로 밀명의 임무를 오붓이 치러낸 듯한 정밀감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부산 콘서트까지 이르는 사이에 벌써 가을의 반이 흘러갔다. 부산을 다녀온 지 일주일 만에 우리는 시골 어느 학교의 강당 무대에 서야했다. 관객이 학생들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또 긴장하게 했다. 낭송의 감동만이 아니라 교육적인 효용도 고려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독도 사랑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도 곁들여 학생의 눈높이, 마음깊이에 맞추기를 애쓰면서 순서들을 펼쳐냈다. 처음 접해보는 낭송이라는 예술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아이들의 빛나는 눈동자와 뜨거운 환호가 무대를 열정으로 끓게 했다. 우리는 무슨 중독자처럼 깊은 행복 속을 빠져들고 있었다.

들판의 곡식들이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과원의 과실들이 탐스럽게 열매 맺어가듯, 우리도 빛깔 찬란한 열매들을 차곡차곡 거두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이 가을의 마지막 무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도서관에서 문화 활동의 일환으로 우리를 초청한 것이다. 올 가을에 우리가 거둘 마지막 보람이라 생각하며 골똘히 준비했다. 가을도 저문 어느 토요일 오후 도서관 시청각실 무대에 섰다.

어라, 시작할 시각이 다 되었는데 관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 공연을 시작했지만 여남은 사람들만 객석을 호젓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초청은 해놓고 관객 모으기에 힘을 덜 써준 주최 측이 야속하게도 생각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단 한 사람의 관객도 우리에겐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저리 귀하게 찾아온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시와 낭송의 아름다움에 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의기를 잃지 않고 준비한 순서들을 흔들림 없이 엮어나갔다. 몇 안 되는 관객이지만 박수도 환호도 열렬했다. 몇 사람의 갈채 속에서 콘서트는 끝이 났지만 우리는 쓸쓸해하지 않기로 했다.

콘서트가 끝나고 모두 함께 모여 앉았다. 그동안 많은 관객의 환호에 도취했던 우리는, 오늘 자칫 절망할 뻔하고 외로워질 뻔했다. 몇 사람의 환호로도 절망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울릉도 죽도를 찾아간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떠올렸다. 작은 섬 죽도의 유일한 주민 김유곤 씨가 피아노 음악 애호가인 것을 알고, 그 한 사람을 위한 연주회를 열기 위해 찾아간 것이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을 연주했다.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한다면 단 한 사람의 관객일지라도 기꺼이 연주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우린 또 연극계의 거장 오태석 연출가를 이야기했다. ‘부자유친이라는 작품을 공연하는데 관객이 네 명밖에 들지 않았더란다. 그 중 한 명이라도 중간에 안 나가도록 최선을 다해보자며 서른 명의 배우가 열심히 공연을 하고, 그 밤에 배우들과 그래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고, 좋은 공연을 했지 않느냐'며 즐거운 술잔을 들었다고 했다.

우리도 술잔을 높이 들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시와 삶의 아름다움을 심어줄 수 있었다면 우리의 콘서트는 성공적이라며 자축의 잔을 들었다. 아름다운 시를 많이 찾아내어 더욱 감동적인 낭송을 할 수 있도록 하자며 결의의 잔을 다시 들었다. 밤이 아름다운 시 속으로, 시가 따뜻한 밤 속으로 들었다. 우리는 발간 잉걸불 같은 기억으로 새겨져오는 그 가을의 분주와 풍요를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보듬어갔다. (201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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