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돌아온 지갑

이청산 2015. 9. 30. 02:40

 

돌아온 지갑

 

 

추석을 맞아 아이들이 왔다. 적적하기만 한 한촌의 밤을 손주들의 재롱과 함께 즐겁게 보낸 이튿날, 아내와 며느리는 대구 큰댁으로 제수를 장만하러 갔다. 아들, 손주들과는 한가윗날인 내일 새벽에 큰댁으로 가기로 하고 집에 남았다.

오랜만에 시골 할아비 집을 찾아온 어린것들과 무얼 하며 놀까?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 손주가 언젠가 보내온 편지에서 할아버지가 사는 곳에 있는 박물관도 가보고 싶고 철로자전거도 타보고 싶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원하는 곳에 가보기로 했다.

어린것들에게 모처럼 할아비가 인심을 좀 쓰리라며 지갑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농협마트에 들러 과자를 좀 사서 쥐어 주고, 먼저 도자기박물관으로 갔다. 여러 가지 모양의 도자기며, 만드는 과정을 둘러보는데, 아기자기하고 오목조목하게 생긴 찻그릇을 보고 신기해했다. 제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도 했다.

문경새재 옛길박물관으로 갔다. 문경새재가 아리랑의 발상지라며 아리랑 특별전을 열고 있는데, 아리랑의 유래며 여러 가지로 불리는 아리랑의 노랫말을 보며 아이들은 가락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모든 옛길의 흔적이며 동래에서부터 문경을 거쳐 한양으로 뻗어간 영남대로를 따라가 보기도 하다가 박물관을 나와 철로자전거역으로 갔다.

폐선이 된 옛 철로 위에 네 바퀴 자전거를 굴리는 놀이시설이다. 표를 끊어 승차장으로 들어가 넷이서 한 차를 탔다. 페달을 밟으며 철로를 달리는데 푸른 산과 맑은 강도 보이고,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한 과원이며 꽃들이 우거진 꽃숲도 보인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가며오며 한 시간 정도를 유쾌하게 타고 나오니 해가 노을을 곱게 뿌리고 있다. 참 모처럼 할아비가 지갑을 열어 아이들을 기쁘게 해준 즐거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다시 즐거운 밤을 보내고 일어난 새벽, 한가윗날. 차례를 준비하고 있을 큰댁으로 향하려 집을 나서며 주머니를 만져보니, 이런 변이 있나! 지갑이 없다. 집 안에 있을 만한 곳을 다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빠뜨릴 곳이라 곤 마지막으로 지갑을 연 자전거역밖에 없을 것 같다. 약간의 현금은 차치하고라도 몇 장의 카드며 신분증들은 어찌해야 하나.

자전거역으로 달려가 본다 해도 명절 새벽부터 문을 열 리 없을 테고, 차례에 늦을세라 머뭇거릴 시간도 없다. 우선 급히 카드사들에 전화를 했다. 휴일에도 사고 신고는 받는다며 모두 분실 처리를 해주었다. 그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불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큰댁으로 향했다.

이 마음으로 여러 사람들이 빌어준 것처럼 어찌 넉넉하고 행복한 추석을 맞을 수 있을까,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려다 오히려 불안하게 만든 것이 딱하기도 하고, 감수하거나 돌리기 위해 애써야할 손실들 생각에 답답하기도 했다. 지갑 속에 들어있는 중요한 메모는 또 어찌할까.

복잡한 생각들을 안은 채 고속도로를 돋우어 달려 큰댁에 이르렀다. 벌써 제물을 모두 진설해놓고 있었다. 차례를 모시면서도 잃어버린 지갑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이 상 앞에 지방으로 앉아계시는 부모님께 여간 송구하지 않았다. 이리 덩둘한 자식을 너그러이 안아달라며 용서를 빌었다. 행여 좋은 소식이 있을까 싶어 차례를 마치자마자 자전거역으로 전화를 해보았으나 받을 리가 없다.

큰댁 차례를 마치고 작은댁으로 옮겨가면서도 머릿속은 지갑 생각으로 어지럽다. 작은댁 차례를 모시고 나니 정오가 넘었다. 실낱같은 기대와 함께 전화를 하니 목소리가 무슨 계시처럼 들려왔다. 명절이라 오후부터 개장하는 모양이었다. 혹 지갑 하나 주워놓은 게 있느냐고 다급히 물으니, 승차장에 떨어진 걸 주워놓았다며 가지러오라 했다. , 이런 다행이 있나! 그 속에 무엇이 있느냐 없느냐는 물어볼 게재가 아니었다. 고맙고 감사하다며 곧 달려가겠다고 했다.

아직 의례가 끝나지 않았다. 모두 나서 선산이 있는 시골을 향해 성묘길을 달렸다. 마음은 급한데 차는 왜 그리 밀리는지, 끓는 속을 억지로 누르며 선산에 닿았다. 부모님 산소와 몇 곳의 성묘를 마치고 자전거역을 향해 길을 돋운 것은 해가 뉘엿거릴 무렵이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역에 닿아 사무실로 갔다. 지갑을 찾으러 왔다 했더니 이름을 묻고는 내주었다. 분명 내 지갑이다.

연락처를 찾기 위해 열어 보았다며 속을 살펴보라 했다. 현금은 물론 모든 것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자전거 발판에 떨어진 걸 어느 노신사가 주워왔더라고 했다. 내가 탔던 자전거인 것 같다. 참으로 고맙다며 그 노신사의 연락처를 물었으나, 주인 찾아 전해 달라고만 하며 말없이 가더라고 했다. 어떻게 감사한 마음을 드려야 하겠느냐며, 보관한 분에게라도 사례하고 싶다 했더니, 힘주어 손사래 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베풀라 했다.

남의 가방이며 지갑을 주워 주인 찾아 돌려준 사람들의 미담은 뉴스를 통해 가끔 들은 바 있지만. 바로 내가 겪을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이 따뜻한 마음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사례를 한사코 사양하는 역무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나오면서도 무언가 할 일을 못한 것 같아 뒤가 자꾸 돌아보였다.

잃어버린 지갑이 돌아왔다. 돌아온 것은 지갑만이 아니었다. 자칫 잃어버릴 뻔했던, 우리 사는 세상 곳곳에 따뜻하게 깃들어있는 인정이 자리를 찾아 돌아온 것이다. 이런 인정이 있는 한 세상은 참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라 생각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베풀라는 역무원의 말을 느껍게 되새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한 그 한가위는 즐겁고도 풍요로웠다. 넉넉하고도 평화로웠다. 오늘 한가위는 더욱 풍요롭고 평화로운 것 같았다.

귀하게 찾은 지갑을 따스하게 품고 바야흐로 금빛으로 물들고 있는 논들 길을 달린다. 가을 맑은 바람결을 타고 묵직한 고개를 점잖게 일렁이고 있는 벼들이 차창을 홈홈하게 누벼든다.(2015.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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