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꽃잎 책갈피의 꿈

이청산 2015. 9. 2. 11:59

꽃잎 책갈피의 꿈

 

올 굵은 삼베 자루 속에 사는 해바라기 씨앗이 있었다. 자루 속이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그 중 한 씨앗은 다른 씨앗들이 체념을 할 때에도 바깥으로 나가 마음대로 햇볕을 쬐며 살 수 있기를 갈망했다. 주인의 줌에 쥐여 밖으로 나간 씨앗이 박새의 먹이가 되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세상으로 나가 뭔가 좋은 일을 해보고 싶은 꿈을 버리지 않았다.

드디어 그 씨앗도 친구들과 함께 푹 떠올려져 밖으로 나와 땅바닥에 내던져지면서 눈부신 세상을 보게 되었다. 단비라는 이름의 주인 아이에 의해 좋은 씨앗으로 가려지면서 깜깜한 땅 속에 심어지게 된다. 땅 속은 어둠과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지만, 단비를 맞으며 시련을 참고 견디는 사이에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싹이 되어 세상으로 다시 나와 점점 자라면서 황금빛 꽃 이파리를 가진 멋진 해바라기로 피어나 태양과 친구가 된다.

미국 수피즘(Sufism)협회에서 엮고 우계숙이 풀어 옮긴 꼬마 성자라는 책속에 실려 있는 어느 해바라기 씨앗의 일생이라는 글의 이야기다. 이 책에는 사랑과 깨달음을 주제로 한 열여덟 편의 우화가 실려 있는데 그 이야기들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은 내가 한 생애의 이력을 마감하고 번다한 세상을 떠나 자연과 더불어 살리라 작정하면서 세간을 정리할 때 우연히 눈에 뜨인 것이다. 내가 산 적도, 본 적도 없는 책이었다. 이십여 년 전에 나온 것이었는데, 책 속에는 여러 가지 예쁘고 귀여운 꽃잎이며 나뭇잎들이 갈피 간간이 곱게 끼어 있다. 누가 읽던 책일까?

책의 어느 장을 넘기노라니 낯익은 글자가 보였다. 딸아이의 글씨였다. 책의 발행 연도로 보면 아이가 열서너 살 때 사보았던 것 같다. 조금 지나 사봤다고 하더라도 한창 꿈도 많았을 중고생 시절에 읽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딴은 가슴 갈피갈피에 맑고도 고운 꿈과 사랑, 풋풋하고도 따뜻한 희망과 이상을 새겨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아이는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얻어 집을 떠나갔다. 직장생활 중에 만난 청년과 결혼하여 제 아이를 두고 지금은 직장인으로, 주부로, 엄마로 살고 있다. 제 아이를 위해 육아 휴직도 하고, 때로는 제 남편과 티격태격도 하면서 살고 있는 모양이다. 꼬마 성자를 읽을 때의 꿈과 사랑이 얼마나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한 생애를 뒤로 하고 지난 세상을 떠나오는 이삿짐 속에 그 책을 넣어와 지금 내가 읽고 있다. 숲정이 산이 둘러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을 찾아와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새 삶을 살면서 해바라기의 일생과 같은 삶의 역정을 밟아가고 있다. 한창 한촌 생활에 젖어들고 있는 나의 삶은 햇볕 세상으로 나가기를 바라고 있는 해바라기의 삶 어름을 살고 있다고나 할까. 한촌의 풍정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중이다. 내 딸아이가 꽃잎 책갈피를 끼우며 키우려 했던 그 책 속의 사랑과 깨달음을 이제 내가 키워 나가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꿈을 키워 왔던 딸아이는 지금 중년의 고개를 넘어서고 있다. 제법 나이가 들었다 할 수 있지만, 아직은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남아 있는 젊은 나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즐거웠던 일이며 괴로웠던 일, 기뻤던 일이며 슬펐던 일, 행복으로 느껴졌던 일이며 불행으로 다가왔던 일 들을 엇바꾸며 많이 겪어왔겠지만, 아직도 제가 넘고 건너야할 생애의 일들은 숱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삶에 대하여 조금씩 익혀가는 나이라 할까. 해바라기의 일생에 비하면 저는 지금 땅속에서 단비를 기다리며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 즈음이라 할 수 있을까. 저도 출산을 해보아 알겠지만, 새로운 싹을 틔우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사랑과 깨달음의 우화집 꼬마 성자를 읽으면서, 갈피갈피 꽃잎을 끼우며 꿈을 키웠던 그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삶의 모든 시련을 사랑으로 이겨내어 그야말로 태양과 벗할 수 있는 멋진 꽃을 피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그 책을 펴든다. 꼬마 성자, 시냇물 한우리의 깨달음, 태양의 기도, 달이 된 사나이, 목마를 타고 간 하늘나라 등 꿈과 사랑을 일깨워주는 많은 이야기들이 재미가 있으면서도 삶에 대한 갖은 상념에 젖게 한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는 어떻게 자연과 하나가 된 삶, 무엇에도 욕심내지 않는 삶, 모든 것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무위의 삶을 살 것인가를 생각한다. 내사 더 바랄 게 무엇이 있을까.

이제 딸아이는 제 아이가 점점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머잖아 제 아이가 이 책을 읽던 저의 나이만큼 성숙하게 될 것이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을 고이 간직했다가 제 아이, 나의 손주가 좀 더 자라면 전해주고 싶다. 제 어미가 꾸었던 꽃잎 책갈피의 꿈도 전해주어 저의 마음속에도 아름다운 꿈과 사랑이 자라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내 일과의 절정을 이루면서 하루를 장엄하게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 큰 나무와 작은 풀, 뾰족 잎과 넓은 잎이 모두 하나로 어울려 살고 있는 산속을 들며, 나도 그 소리 중의 하나, 그 잎 중의 하나가 되어가고 싶다.

그렇게 되는 날 내 삶도 태양의 벗 해바라기 꽃처럼 새롭고 눈부신 세상에 들 수 있을까. 언젠가 딸아이에게 손주에게 올 사랑의 찬연한 세상을 그리며 숲 사이 노을 곱게 비끼는 산을 오른다.(201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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