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기다림에 대하여(1)

이청산 2015. 8. 11. 19:56

기다림에 대하여(1)

 

상사화 대궁은 오늘도 솟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벌써 솟아 탐스런 꽃을 피우거나, 한창 솟아나기도 할 대궁이다. 다른 곳에는 더 일찍 기다란 대궁 위에 활짝 핀 분홍색 꽃을 사방으로 달고 있기도 하지만, 마을 숲엔 그늘이 많이 지는 탓인지 좀 늦게 피어난다.

아무리 늦게 핀다고 하여도 올해는 너무 늦다. 왜 여태 피지 않는 걸까. 한 해를 그냥 지나가려는가, 초조하고 불안해지기도 한다. 작년보다 다른 게 있다면 그 꽃밭 둘레에 금줄이 둘러쳐져 있다는 것이다.

마을 숲엔 소나무 느티나무 회나무 팽나무 노거수가 우거져 여름이면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상사화는 그 나무들이 우거진 숲의 가장자리 한 곳을 차지하여 피어난다. 그 시원한 숲 그늘을 찾는 행락객들의 걸음이 잦다. 작년 어느 행락객이 상사화가 피어난 자리 바로 옆에 천막을 치더니 대궁을 마구 부러뜨리고 짓밟았다. 그 만행이 하도 미욱하고 안타까워 꽃밭 둘레에다가 막대를 박아 금줄을 쳤다.

다행히 그 금줄 안으로는 침범하지 않았다. 남은 상사화는 꽃이 지고 가을이 깊어지면서 대궁도 말라 땅 속으로 들어 한 해의 삶을 마쳤다. 눈 내려 쌓이던 겨울도 가고 봄이 올 무렵 상사화는 쌓인 낙엽을 뚫고 난초 같은 잎을 피워 올렸다.

봄이 무르익어 가면서 차츰 자라 두껍고 넓은 춘란처럼 무성한 잎을 피워 내더니 봄이 저물어 갈 무렵 서서히 말라들기 시작했다. 잎사귀에 노란 물이 드는가 싶더니 이내 황갈색으로 변하면서 여름이 고비에 이를 무렵부터는 잿빛이 되어 사그라져 갔다.

그래, 저 잎이 저렇게 사그라져야 꽃이 필 수 있지 않은가. 잎과 꽃은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그리워만 할 뿐이라 이름조차 상사화(相思花)라 하지 않았던가. 맺을 수 없는 사랑의 아프고도 슬픈 전설을 간직한 꽃이 아니던가.

이제 곧 대궁이 솟으리라. 내일 아침이면 수줍은 듯 머리를 숙인 채 뾰족이 올라오는 애순을 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기다린 나날이 흘러 여름이 한고비를 넘어 가고 있어도 꽃소식은 아련하기만 했다. 여느 해 같으면 벌써 한창 피어 있을 때도 넘어섰다.

상사화를 기다리는 일이 어느새 나의 일상이 되어갔다. 날마다 산책길 마을 숲에 들면 맨 먼저 상사화 밭을 찾아간다. 저는 무얼 그리고 있을지 몰라도 나는 저를 향한 그리움에 떨다 못해 애틋한 모심으로 온 가슴을 채운다.

내 그리움은 잡초로 돋아날 뿐이었다. 잡초만 성성해질 뿐 꽃 대궁은 보이지 않는다. 대궁이 솟아나지 않는 까닭을, 꽃이 피지 않는 연유를 모르겠다. 꺾이지 말고 밟히지 말고 잘 피어나라고 금줄을 쳐준 것밖에 없는데, 어여쁜 모습으로 피어나기를 오로지 빌기만 했을 뿐인데, 내 간곡한 바람을 왜 저버리려 하는 걸까?

말라 사그라진 잎의 혼이 나에게로 온 걸까. 그래서 꽃을 그리워만 해야 하는 걸까. 올여름 많이 가물긴 했지만, 여느 풀꽃들은 여상하게 피고지고 하지 않는가. 이 무슨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란 말인가. 정녕 샐리의 법칙(Sally’s Law)은 나의 것이 아니란 말인가. 고래를 사랑하는 어느 시인은 바다로 나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고래를 기다리다가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정일근, ‘기다린 다는 것에 대하여’)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겠다며 쓸쓸이 바다를 떠나고 있다.

그래도 나는 떠나지 않겠다. 상사화는 기다림의 사랑이기에 인내를 바쳐 기다리겠다. 상사화는 여러해살이 풀꽃이라 했다. 올해 꽃을 보지 못하면 내년 봄의 잎을 기다리겠다. 그 잎 뒤의 꽃을 다시 기다리겠다. 내 삶 속에서 기다림이 나를 초조하게 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돌아보면 내 삶의 내력이란 기다림의 초조를 넘고 건너온 역정이었던 것도 같다.

고달플 때도 그리울 때도 기다림이 있었기에 나는 살아올 수 있었다. 그 기다림은 삶의 간난도, 사랑의 신산도 다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 손길 속에서 한 세상 생애가 흘러갔다. 나는 지금 그 세월이 맺어준 열매를 안고 살고 있다. 세상의 고단한 짐들을 벗어버리고 이 한촌을 찾아와 색색 빛나는 풀꽃이며 윤슬 반짝이는 물빛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도 기다림이 준 선물로 알고 기꺼이 살아가고 있다.

상사화가 피기를 바라고 있는 지금의 내 마음도 기다림의 세월 나무에 열린 한 열매일지도 모른다. 이 꽃을 간절히 사랑할 수 있는 것도, 그리운 사람을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는 것도 기다림이 맺어준 따뜻한 열매라 믿고 싶다.

오늘도 상사화는 피지 않았다. 내일 피지 않으면 내년을 기다릴 것이다. 그 기다림이 곧 오늘을, 올해를 간곡하게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간곡한 삶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 살아온 이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 기다림의 끝은 어디일까. 이 세월의 끝은 또 어디일까. (2015.8.9.)

                                                                

          

 

 

 

 

이일배의 <기다림에 대하여·1>을 읽고

 

이일배의 <기다림에 대하여·1>을 읽고

부 명 제

(수필가·수필평론가)

 

고달플 때도 그리울 때도 기다림이 있었기에 나는 살아올 수 있었다. 그 기다림은 삶의 간난도, 사랑의 신산도 다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 손길 속에서 한 세상 생애가 흘러갔다. 나는 지금 그 세월이 맺어준 열매를 안고 살고 있다. 세상의 고단한 짐들을 벗어버리고 이 한촌을 찾아와 색색 빛나는 풀꽃이며 윤슬 반짝이는 물빛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도 기다림이 준 선물로 알고 기꺼이 살아가고 있다.

-이일배의 <기다림에 대하여·1> 중에서

 

작자의 소명대로라면 그가 누려온 삶은 최적화된 모습이 아니다. 일반인들의 사례를 대입하자면 더욱 그렇다. 치열한 생존방식은 그의 삶에서 누락된 사항인 듯하다. 누려온 생애에 쟁취나 포획 같은 탐욕스런 자세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마을 숲 가장자리에 피어난 상사화 무리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자청한다. 이이러니한 상황이다. 그 같은 고양상태가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낯설다. 냉정히 따져볼 때 그 정도의 풍성이면 인간 탐색의 측면에서 상위포지션에 속한다. 상위포지션하면 UFC 경기 장면처럼 주저 없이 파운딩을 날리거나, 엘보를 찍는 화끈한 맛이 동반되어야 제격이다. 전세를 만회할 기회가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아는 생존 법칙이다. 살벌한 케이지(Cage)야말로 삶의 축소판, 다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일배는 이 같은 관점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다. 오로지 기다림 하나로 자신을 지탱하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자구책을 강구할 뿐이다. 지금은 상사화 꽃 대궁이 솟아오르기를 바란다. 그의 내면의 목소리가 왠지 적요하다.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다. 물 빠진 갯벌에 서서 다시 밀물 때를 기다리며 망연자실하는 이가 있다면 어리석다. 도리어 그때가 황금어장인 까닭이다. 갯벌 안에는 낙지, 조개, 짱뚱어까지라도 무궁한 자원이 숨어 있다. 남들처럼 배타고 고기잡이에 전념하지 않아도 살아갈 방도는 이미 확보한 것이다. 단지 생활양식은 담백하게 하고 마음의 양식을 늘리려 노력한다. 그가 원하는 양식은 색색 빛나는 풀꽃이며 윤슬 반짝이는 물빛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도 기다림이 준 선물로 알고 기꺼이 살아가고 있다.”로 강변된다. 이일배의 말의 본성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인 줄 모른다. 그래서 상사화를 표현한 그의 문장은 버성기지 않고 푼더분하다. 상사화를 주제삼은 작품은 많아도 자신의 분위기로 독자의 시선을 끄는 점에서 앞으로 그의 작품을 도외시할 순 없다고 본다.

근대의 문학사조에서 수사학((Rhetoric)은 갈래로 찢겨나가고 경원시하는 경향도 강하지만, 로마시대부터 상류층의 기본교육과목에 반드시 수사학은 논리학, 문법과 같이 3대 필수 교양과목으로 포함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 교육전통은 중세, 르네상스를 지나 19세기까지 이어져왔다. 지금에서야 단순히 문장 작성법에 불과하다 쳐도 너무하다 싶게 수사(레토릭)를 도외시하는 수필작가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이일배의 문장은 대비된다. 호감을 느낄 만큼 잘 쓰였다는 말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인간사후에 시인과 소설가 혹은 수필가에게까지 선별하여 신()의 가꾼 정원에 입장이 허용될 것이다. 만일 수필가에게까지 해당된다면 명단에 이일배 작가의 이름도 올라갈 날이 올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런 이와 미리 악수라도 나누고 싶다. 덕분에 글을 읽는 내내 역설적으로 즐거웠다.                                  

 <대한문학2016가을(통권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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