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상사화가 피었다. 촉을 내밀기 시작한 지 닷새만이다. 자라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할 양이면 쏙쏙 올라와 꽃망울이 생겨나고, 그것이 조금씩 커지면서 꽃이 피어나는 모습들이 보일 것도 같다. 반가운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닷새 만에 이십여 센티로 커서 꽃을 터뜨렸으니 하루에 사오 센티는 족히 커 온 셈이다. 어떤 것은 이제 막 싹이 올라오기도 하고, 엊그제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이 오늘 아침에 보니 자넘이로 훌쩍 커버린 것도 있다. 하루에 십 센티 정도는 커 나왔다는 말인가.
이제 막 피기 시작했으니 아직도 더 많이 피워야 하고, 더 커야 하고, 자라나올 것도 많아 내일 아침이면 얼마나 많은 꽃이 피고, 얼마나 많이들 자라나 있을지 설레게 기다려진다. 마치 무엇을 보람스레 이루어낸 것 마냥 가슴에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 같다.
이렇게 솟아날 걸, 이렇게 쉽사리 커 오를 걸, 이렇게 삽시에 꽃을 피워낼 걸 어찌 그리 애를 태웠던가. 대궁을 솟구쳐내고 꽃을 피울 수 있을 만한 날들을 그리도 무심한 듯 흘렸던가. 기다리는 것은 꼭 이렇게 애를 태우는가. 초조하고 불안감마저 감돌던 나날이었다.
올해 많이 가물었다. 비가 하도 오지 않아 늘 물 맑게 흐르던 마을 앞 강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 가물어서 좀 늦겠거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하면서도, 다른 꽃이 피고 지고 하는 모습을 보면 애타는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문득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 못 보면 괴롭나니’라 하던 어느 경전의 말씀이 생각나기도 했다. 내가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기다릴 일도, 못 보아 안타까워 할 일도 없으리라는 회오와 함께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기도 했다.
내가 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상사화는 노거수가 짙게 우거진 마을 숲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년에 핀 꽃들은 마을 숲을 찾아오는 행락객들의 발길과 손길에 의해 무참히 밟히고 꺾여버렸다. 슬픈 사랑의 전설을 간직한 꽃이라 처참하게 짓밟히는 것이 더욱 안타깝고 애잔하여 그 꽃밭 둘레에 금줄을 둘러쳤다. 그 후로부터 그 꽃은 땅에만 뿌리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도 깊이 뿌리를 박고 사는 꽃이 되었다.
여름이 가면서 꽃도 잦아들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올 무렵부터 잎이 돋아났다. 봄이 무르익을 때까지 무성하게 자라나던 잎은 여름이 들면서 서서히 말라가기 시작하더니 땅속으로 녹아들 듯 사그라져갔다. 머잖아 우아하게 꽃피울 날을 그렸다. 잎이 완전히 잦아들어야 꽃이 피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열흘, 스무날……. 여느 해 같으면 대궁도 다 솟고, 꽃도 피어날 시기가 지나가는데도 전혀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내가 무얼 잘못했는가. 금줄을 둘러주고 잘 피기만을 빌고 있었을 뿐인데-. ‘별나게 무슨 줄을 치고 하더니, 저것 좀 봐!’ 사람들의 비소가 귓가에 묻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가뭄 탓이야, 지금 세상이 얼마나 가문가. 작년보다 좀 더딜지라도 언젠가는 필 거야. 꼭 탐스러운 꽃을 피울 거야. 간절히 기다리다 보니 아주 늦은 것처럼 느껴질 뿐일 거야. 꽃밭을 둘러치고 있는 단단히 맨 금줄처럼 내 기다림의 끈도 다져 매었다.
그 기다림의 끝에서 꽃은 오늘 아침 마침내 말간 얼굴을 내밀며 나에게 수줍은 미소를 건네 왔다. 꽃잎보다 꽃술을 더 길게 내밀었다. 저의 속마음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여느 해보다는 두어 주일 늦게 피어났을 뿐인데, 그토록 조바심을 내었던 것은 나의 조급성 때문이었을까,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볼수록 더욱 사랑스럽다. 가문 땅속에서 둥근 뿌리에 생명수를 갈무리하기 위해 애쓰며 꽃피워내기를 얼마나 골몰했을까. 드디어 꽃을 피워내었을 때 전들 또 얼마나 감격에 젖었을까. 내가 감격해하는 것보다 더 큰 감격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시간을 다시 돌아본다. 피는 날까지 나는 사랑으로 기다리리라 했다. 여러해살이 풀꽃이 아닌가. 올해 꽃을 못 보면 내년을 기약하리라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 기다림 끝에 마침내 꽃이 피었다. 피워냈다. 마치 내 사랑의 승리인 듯했다.
그랬다. 어쩌면 기다림이란 사랑과 동의어인지도 모른다. 사랑 없는 기다림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기다림 없는 사랑이란 또 얼마나 야속한 것인가. 사랑이란 간곡한 기다림의 나무에 열리는 달콤한 과실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기다림이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기약할 수 없는 미래 그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미래란 무엇인가. 오늘이 곧 어제요 내일이듯이 미래도 곧 오늘이요, 지금 이 순간이다. 기다림이란 이 순간을 아름답게 하고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오늘 어여쁘게 피어난 꽃을 보면, 피기를 기다리며 애태웠던 지난 순간들이 달콤하고도 생기로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시인은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조병화, ‘늘, 혹은’)라고 했다.
그 끊임없는 생각이며 그리움이란 곧 기다림이 아닐까. 그 기다림이 오늘 내 살아 있음을 명확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기다림은 오늘 나의 삶을 아름다운 생동으로 이끈다. 그 힘이다.
나는 오늘도 기다린다. 더욱 활짝 필 상사화를-. 언젠가 꽃은 지겠지만 내년을 또 기다릴 것이다. 조금 애를 태우며 피는 모습도 사랑스럽다. 오늘의 달콤한 기다림을 위하여-.
내 그리운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201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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