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큰비 내린 강물처럼

이청산 2015. 7. 18. 15:43

큰비 내린 강물처럼

 

기다리던 큰비가 내렸다. 홍수가 날 만한 큰비는 아니었지만, 해갈을 할 수 있고, 흉한 것들을 쓸어 떠내려가게 할 수 있을 만큼 생광스럽게 내린 비였다.

마을 앞에 작은 강이 하나 흐르고 있다. 아침마다 그 강둑을 걸으며 맑게 흐르는 물로 어지러운 마음을 씻기도 하고, 앙증한 미소처럼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기쁨과 즐거움을 얻기도 한다. 물가에 새파랗게 우거져 있는 물풀이며 갈대숲은 마음속까지 푸른 물이 들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강물이 머물러 가는 보에 무엇이 떠다니는가 싶더니, 떠있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부옇고 누런빛이 물을 덮어갔다. 강둑을 걷노라면 시궁창같이 고약한 냄새가 차오르기도 했다.

강둑을 내려 물가로 가보니 분뇨 덩어리로 보이는 오물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 맑은 강에 누가 무엇을 방류했단 말인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다. 산책의 아침마다 이 광경이며 이 악취를 어찌 보고 맡아야 한단 말인가. 절망감과 함께 분노가 솟았다.

강을 관장하는 관서에 알리고 조처를 촉구했다. 담당자가 달려왔다.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강을 덮고 있는 오물덩어리보다 더 큰 실망감이 치솟았다. 저 흉측한 것들이며 이 악취를 어찌해야 할 것이냐며 항의했다.

우선 보의 수구에 몰려 있는 악취덩이들을 제거하겠다며 오물 수거 차량을 불러서 걷어냈다. 보 가운데 있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큰비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이 문명한 세상에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거냐고, 이런 일이 벌어질 적마다 하늘만 바라볼 거냐고 항의를 했지만, 장비도 인력도 없다며 난감해 했다. 관의 일이 그토록 무력한 것인지, 나의 항변도 분노도 무망하기만 했다.

내가 오염원을 밝혀보리라 하고 찾아 나섰다. 강물을 더럽힌 원인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화를 신고 물가를 거슬러 올라갔다. 오염원을 찾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과 힘이 들지 않았다. 잠시 물을 딛고 올라간 곳에 강을 가로지르는 오수관이 보였다.

그 오수관이 지나는 건너편 강둑 아래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겨왔다. 냄새를 따라 가보니 갈대숲 속에 오수를 모아서 보내는 커다란 맨홀이 나타났다. 어느 날 그것이 폭발이라도 한 듯 주위에 오물이 흥건하게 널브러져 있고, 많은 오물이 강으로 흘러들어간 흔적이 역력했다.

왜 관서 사람들은 발견을 못했단 말인가. 분노를 누르려 애쓰며 다시 연락을 하니 달려왔다. 그제야 업무상의 소홀을 시인하며 빨리 조치를 하겠다고 했다. 며칠 뒤의 조치는 오물이 솟아오르지 못하게 맨홀의 뚜껑을 단단히 땜질하는 것이었다.

이런 미봉책이 있는가, 하는 나의 항변에도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절망도 분노도 큰비에 대한 바람으로 삭혀야만 했다. 하릴없는 무력감만 안은 채 맑고 깨끗한 나의 산책길을 위해서 기다려야 할 것은 오직 큰비일 뿐이었다.

큰비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사람들이며 온갖 작물들이 가뭄에 타 들어가던 어느 날, 간절한 바람을 그제야 하늘이 안 듯 비를 내렸다. 지나가던 무슨 태풍이 큰비를 가져다 준 것이다. 태풍은 다행히 비만 내려주고 갔다.

강물이 불어 물막이를 넘쳐 거세게 흘렀다. 맑은 물을 얼룩지게 했던 것들이 드디어 보 너머로 떠내려가면서 강물이 제 빛을 찾아갔다. 다시 맑은 산책길을 맞이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저 물줄기보다 더 시원스레 내 안으로 흘러들었다. 희열과 환희가 되어 스며들었다.

그 강물을 보는 순간, 큰비가 내려야 할 곳은 저 강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솟는다. 내 머리에도 가슴에도 큰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가슴과 머리를 채우고 있는 모든 곱지 못한 과거, 아름답지 못한 기억들을 휩쓸어 가면 좋겠다.

삶의 나이테가 자꾸 늘어나는 탓일까. 지나온 세월이 돌아 보일 때가 많다. 아름다운 추억, 고운 기억만이 나의 것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돌아볼수록 아린 기억이며 부끄러운 일들이 회한으로 쌓여온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킴벌리 커버거)이라는 뉘우침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또 누가 말했던가. “지금의 너를 탄생시킨 것은 바로 너의 지난 모든 과거다.”(생텍쥐페리)라고. 그랬다. 지난날의 부끄러운 일들을 아파하는 지금의 내 모습은 바로 덩둘하게만 살아온 내 과거가 만든 것이지 않은가. 더럽혀진 강물에 오염원이 있듯 내 마음 편치 못한 현재에는 슬기롭게 살아오지 못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겠다.

그 과거를 어찌할까. 내 머리에 가슴에, 큰비가 아주 큰 비가 내려, 모든 것을 그 모든 것을, 시원스레 아주 시원스레 쓸어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큰비 뒤의 저 맑은 물처럼 아주 맑은 새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 어찌 과거가 따로 있을까. 지금도 나는 과거를 쌓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름답지 못한 과거를 쌓아가면서, 또 어찌 말끔히 씻어줄 큰비를 바라랴. 다시 나를 돌아보자. 저 강물의 오염물을 떠내려 보내기 위해 그토록 절망하고 분노했던 마음으로 나를 절망하고 분노하자.

날마다 바라보며 사랑하는 저 물에 부쳐, 떠내려가는 저 오염물에 부쳐 내 곱지 못한 과거도 함께 흘려보내고, 오늘 산책길의 저 맑은 강물처럼 맑은 오늘을 살 일이다. 어제의 맑은 오늘을 살고 내일의 고운 오늘을 살 일이다.

큰비 내린 저 맑은 강물처럼-.(2015.7.14.)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유의 자유  (0) 2015.07.31
사랑의 힘  (0) 2015.07.26
아름다운 소풍  (0) 2015.07.05
무위의 운동 길  (0) 2015.06.13
나무는 늙지 않는다  (0) 2015.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