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봄에는 몸이 가렵다

이청산 2015. 4. 1. 18:52

봄에는 몸이 가렵다

 

한촌의 봄은 봄까치꽃으로부터 왔다. 어제는 봄비가 들판을 촉촉이 적시더니 오늘 아침 논두렁에 갓난아기 조막손 같은 새파란 이파리들 사이로 하늘색 잔꽃들이 초롱초롱 피어났다.

올봄 들어 처음 맞이하는 꽃이다. 꽃말처럼 무슨 기쁜 소식이며 희망을 가지고 왔을까. 이해인 시인은 이 꽃을 두고 까치가 놀러 나온/ 잔디밭 옆에서/ 가만히 나를 부르는/ 봄까치꽃이라 했다.

그 꽃을 보노라고 두렁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무엇이 꼼지락거리는 듯하다. 무슨 미물인지 소리 없이 흙의 틈을 비집으며 빼족빼족 고개를 내밀고 있는 듯하다. 흙이 몸을 떨고 있다.

산을 오른다. 날마다 오르는 산이지만 요즈음은 오를 때마다 무언가가 달라져 있는 것 같다. 솔잎이며 노간주나무 잎 빛깔이 어제보다 더 새뜻해져 있고, 바람이 한결 부드럽고 향기롭다.

생강나무 가지에 눈이 트는가 싶더니 어느새 노란 꽃을 조막조막 피워냈다. 어라, 저 건 또 언제 피었나. 올괴불나무 마른가지가 아기 눈썹 같은 꽃을 총총 달고 있다. 분꽃나무도 뾰족뾰족 잎눈을 틔우고 있다.

드디어 맺혔구나. 진달래가 가지 끝마다 송송송 망울을 틔워냈다. 저 성질 급한 것 좀 보게, 하나는 꽃도 이미 피워 올렸네. 언제 봄이 이만큼 왔는가. 꽃샘바람이 지나간 적이 언제라고 벌써 세상을 이리 바꾸어놓는가.

갑자기 겨드랑이에 무엇이 스멀스멀 기고 있는 것 같다. 등판이 송글송글 두드러기라도 솟는 것처럼 가렵다. 겨드랑이를 비집고, 등판을 뚫고 무엇이 솟아나올 것만 같다. 비록 저 작은 올괴불나무 꽃 같은 것일지라도 맺혀서 나올 것만 같다.

산을 오래 걷다가는 몸살이라도 날 것 같다. 문득 사전에도 없는 꽃몸살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에게 느껴져 오는 이 기운이 꽃몸살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참 주책없다. 내가 무슨 꽃철이라고 그런 몸살기를 느낀단 말인가. 꽃 피는 시절을 지나도 한참 지난 내가-.

낡은 필름 같은 지난 세월의 그림자가 언뜻 내 속을 훑는다. 여태껏 살아온 것을 보면 나에게도 싹 트고 꽃 피던 시절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한 때 피어나는 꽃처럼 생기로운 철도 있었겠지. 가물가물하다. 그 시절을 돌이켜 새기기에는 기억의 저장고에 세월의 더께가 너무 두텁게 끼어있다.

그 더께를 걷고 보면 무슨 기억들이 웅그리고 있을까. 어쩌면 풋풋하고 따뜻하고 넉넉하고 흐뭇한 기억보다는 부끄러움, 어설픔, 외로움, 고달픔 같은 고단한 기억들이 더 많이 들어 있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흘러간 것들은 아름답고 했는데, 나에게서 흘러간 기억들 중에는 아름답지 않은 장면도 적지 않은 것 같아 가슴 시릴 때가 있다. 지혜와 덕이 모자란 탓이었을까,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 줄을 몰랐던 까닭이었을까.

나의 세월은 그렇게 우둔하게 흘러갔다. 그 흐름 속에서 한 생애를 마감하고 지금은 그 세월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새 세월을 쌓아가고 있다. 지난 세월에 어린 간난도 희열도, 회한도 환희도 모두 오롯이 묻어버렸다.

그렇게 지나온 세월의 가지 끝에 열린 작은 열매라고나 할까. 나는 지금 바람소리 새소리로 에워싸인 곳에서 집착도 욕심도 가질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담담히 밀물져 오는 세월을 티 없이 쌓아 가면 될 뿐이다.

비로소 나의 봄을 맞은 것 같다. 새봄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봄은 가려움의 계절인가. 온몸이 가렵다. 두드러기가 송송 돋는 듯이 가렵다. 저 나무의 몸인들 얼마나 가렵고, 흙의 몸은 또 얼마나 가려울까.

농부가 흙의 몸을 긁어주고 있다. 사람의 힘으로 못다 긁을 가려움인가. 육중한 기계가 갈퀴 세워 파고들며 시원스레 긁는다. 흙이 활짝 기지개를 켠다. 내 몸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다. 두 팔을 벌려 숨을 크게 들이켜 본다. 햇살이 맑고 하늘이 푸르다.

이제 저 나무에는 색색 꽃이 피고 푸른 잎이 돋을 것이다. 그 속에 뭇 새들이 날아 앉아 삶의 환희를 노래할 것이다. 저 논들에도 생명의 물이 찰랑거리고 푸름이 짙어올 것이다. 그 초원에 싱그러운 희열이 넘칠 것이다.

, 봄에는 온몸이 가렵다. 몸살이 날 만큼 가렵다. 누가 나의 몸을 시원스레 긁어줄까.

그 가려움 속으로 시 한 구절이 난데없이 날아든다.

 

설령 온 몸에 발진이 돋아난다 해도

동백꽃 닮은 발진이라면

나도 후끈한 붉은 몸살 한번 앓고 싶다.

                                                    -김점숙, ‘꽃몸살(201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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