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삶의 미세기후

이청산 2015. 2. 21. 14:37

삶의 미세기후

 

산 한쪽이 온통 빨간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다. 어느 날 마을에 들어온 산판꾼들이 비탈의 나무들을 가릴 것 없이 마구 잘라내어 버렸다. 산주와 긴밀한 거래를 거쳐 잘라냈겠지만, 산에서는 그날로부터 거친 신음소리 같은 바람이 마을로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나무를 봐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고 목재와 돈 덩어리로만 보는 사람은 걸어 다니는 죽은 사람이라고 한 포르스트 카터(Forrest Carter 1925~1979,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어낸 사람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산에 나무가 우거져 있으면 싱그러운 생명감이며 청량감을 느낄 수 있고, 겨울 찬바람이 불 때는 나무가 가림막이 되어 한결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 그 청량감이며 아늑함을 여지없이 박탈당한 것 같아 삭막하고 허탈한 마음을 사릴 수가 없다.

나무를 보면서 느끼는 청량감이며 아늑함이란 단순히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느낌만은 아닌 것 같다. ‘미세기후(微細氣候, microclimate)’라는 말이 있다. 좁은 지역 내의 기후 차이를 뜻하는 말이다. 예컨대, 여름이면 나무 그늘 바깥보다 그늘의 온도가 낮기 때문에 시원한 나무 그늘이 좋고, 겨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들판보다는 나무가 둘러 서 있는 산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미세기후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지녁이라도 산 아래 마을과 강가 마을의 기온이 다르고, 단층집이 있는 마을과 고층빌딩이 있는 동네의 바람이 다르고, 집 앞마당과 뒤뜰의 온습도가 다르고, 응달과 양달의 눈이 녹는 것이 다르고, 담 밖과 담 안의 온기가 다르다. 이런 차이를 모두 미세기후라 할 수 있다.

이 미세기후는 식물들이 사는 생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차가운 겨울 빈 밭에서 살고 있는 냉이며 고들빼기, 망초, 지칭개, 민들레, 엉겅퀴 같은 근생엽(根生葉)들은 고랑에 살지 않고 이랑이나 두렁 위에서 산다. 고랑이나 두렁 아래보다 더 따뜻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하늘 향해 쑥쑥 솟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도래방석처럼 둥글넓적하게 똬리를 틀고 산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태양열이며 땅에서 솟아나는 지열을 한껏 모아서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그 맵시가 마치 장미꽃 송이 같다하여 생물학에서는 로제트(rosette)형 식물이라 한다. 이렇듯 미세기후를 잘 갈무리 하는 자연의 이치며 지혜가 참으로 경이롭다.

이 미세기후의 이치가 어찌 자연계만의 현상일까. 돌아보면 우리 사람살이에도 자연계 못지않은 미세기후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이 미세기후가 죽살이며 행불행을 가르는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같다.

집안에 한 사람이 있고 없음에 따라 많은 온도차가 난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엄마가 보이지 않아 허전함을 느끼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을 것이다.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자식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은 또 어떤가.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찾아온 자식이나 손주들을 맞이하는 마음은 살갑고 화기롭다.

있어야 할 사람 다 있어 함께 어우러져 살지라도, 서로 사랑하며 사느냐 미워하며 사느냐에 따라, 서로 배려하며 사느냐 갈등하며 사느냐에 따라, 서로 도와가며 사느냐 시샘하며 사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 정도의 차이에 따라 삶의 모습이 아주 달라질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정다운 이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마음을 주고받을 친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리움을 함께 나누고 살 사랑하는 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삶의 향기, 인생의 의의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자연계의 미세기후와 같은 사람살이의 미세기후가 아닐까. 곧 마음의 미세기후다.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서 불행할 걸 안다면 서로 소중하게 생각해주고, 사랑하여 행복할 걸 안다면 서로 이해해 주기를 애쓰고, 가까운 사람이 없어 쓸쓸할 걸 안다면 서로 감싸 안아주는 그 마음의 미세기후-.

그런 마음은 어떻게 오는가.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아주 작은 양보, 작은 배려, 작은 이해, 작은 사랑……. 바로 그 미세기후를 잘 건사하는 것이다. 그 작은 기후가 차가운 것이 아니라 따뜻한 것이 되도록, 거친 것이 아니라 보드라운 것이 되도록, 쌀쌀한 것이 아니라 아늑한 것이 되도록 갈무리하는 것이다.

, 그런 걸 이 나이 되도록 살아오면서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진실로 알기나 한 건가. 오늘 아침에도 아내와 다투었다. 별 것 아닌 일로 티격태격했다. 마음의 미세기후를 잘 건사하지 못한 탓이다. 마음은 번하면서도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 것이 나약한 내 삶의 일이던가.

소연한 마음에 문을 열고 나서면서 문득 마당 텃밭을 보니, 지난 초겨울에 갈아놓은 봄배추가 잎을 땅에 바짝 붙이고 잘 자라 있다. 혹한의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몸을 한껏 낮추어 땅과 하늘의 미세기후를 다잡아 들이키고 있다. 그 기후를 잘 갈무리하여 살고 있다.

내 삶의 미세기후는 지금 몇 도인가.(2015.2.15.)

 

이 글은 권오길 박사의 생물학 이야기’(조선일보 2015.2.13.)를 참고하여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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