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은퇴자의 축복

이청산 2015. 4. 18. 20:46

은퇴자의 축복

 

봄이 무르익어 가던 어느 날, 육칠십은 되어 보이는 낯선 두 사람이 마을에 들어섰다. 한 사람은 배낭을 메고 있었고 한 사람은 긴 자루를 한 어깨에 메고 한 손에는 양쪽 손잡이가 달린 쇠막대 기구를 들고 있었다.

동네 뒷산을 오르려는데 어디로 가면 되느냐고 길을 물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느냐고 하니, 이 산에 벚나무가 많은 걸 알고 생태 조사를 하러 왔다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한 분은 임학박사 장 선생, 한 분은 농학박사 이 선생으로 육종, 육묘에 관해 연구하며 평생을 나무와 더불어 살아왔다고 했다.

산림과학원에서 연구직으로 근무하다가 몇 해 전에 정년퇴임했는데, 재임 때의 지식과 기능을 다시 살려 달라며 벚나무류 우량집단 조사 연구 용역을 주어 그 임무를 수행하러 왔다고 했다. 나도 몇 해 전에 한 생애를 마감하고 이 마을로 들어와 살고 있노라며 인사를 나누었다. 다 같이 비슷한 연배의 은퇴자라는 처지가 쉽게 친밀감을 느끼게 했다. 내가 늘 오르는 곳이라며 안내를 자청하며 앞장을 섰다.

내 산처럼 즐겨 오르는 집 뒷산 주지봉에는 유독 벚나무가 많다. 봄이 익어가면서 벚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산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노릇한 나무눈을 피워내는가 싶으면 어느새 하얀 꽃잎들이 활짝 피어난다. 산을 온통 휘덮는 하얀 벚꽃에 막 돋아나는 연록 진록의 온갖 새잎들하며 분홍빛 산복숭, 진달래 붉은빛이 서로 어울려 산은 온통 현란한 색깔의 향연을 펼친다. 거기에 강둑의 눈부신 왕벚꽃 행렬과 더불어 현란한 꽃들이 온 마을을 둘러싼다. 꽃 속에서 꽃과 더불어 사는 일보다 더 황홀한 즐거움이 또 있을까.

많은 산꽃들 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큰 나무에서 오종종 커다란 무리를 이루며 화사하게 피어나는 산벚꽃이다. 그 산벚나무를 찾아간다. 오늘은 찬란한 꽃을 즐기러 가는 것이 아니라 탐사하고 연구하러 간다. 그 아름다운 꽃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수많은 벚나무 중에서 장 박사와 이 박사가 찾는 것은 일찍 가지가 벌지 않고, 휘어지지 않고 곧게 자란 나무다. 그러한 성질을 통직성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 나무를 골라서 나이며 키, 굵기, 수관폭, 개화량 등 십여 가지 항목을 측정하고 가을에는 열매도 채취한다는 것이다.

우선 연구 대상에 알맞은 나무를 찾는 작업을 해야 한다. 내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오며 중간 중간이 그런 나무를 찾아내어 길에서 그 나무가 잘 보이는 곳에 표식을 해두었다. 그들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길을 모르면서 나무를 찾아다니자면 힘도 많이 들 뿐 아니라 길을 잃기 십상인데, 잘 인도해주니 여간 편하고 고맙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산을 사랑하여 늘 오르는 보람이 여기에도 나타나는가 싶어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만큼이나 마음도 상쾌했다. 연구에 알맞은 나무를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등성이 골짜기 가풀막을 헤매면서 20여 그루를 찾아내고 나니 날이 저물었다.

장 박사와 이 박사는 읍내 어느 곳에서 자고 이튿날 마을로 돌아왔다. 그들과 함께 다시 산으로 향했다. 오늘은 여러 가지 항목을 세세히 측정해야 한다. 찾아놓은 첫째 나무에 이르렀다. 장 박사는 우선 나무가 서있는 곳의 위도와 경도, 해발고를 재었다. 다음에 누가 찾아와도 나무의 위치를 잘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박사는 메고 있던 자루에서 긴 막대를 꺼내더니 나무에 대고 한 칸 한 칸 뽑아 올려 높이를

 쟀다. 쇠막대를 땅에 꽂아 손잡이를 힘주어 돌려 박아 토양을 채취했다. 쇠침을 돌려 나무에 꽂아 수령을 쟀다. 조그만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잘린 부분을 물종이로 싸서 봉지에 담았다. 장 박사는 흙의 색깔과 성질이며 여러 가지 측정값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나무에 노란 띠를 둘러 번호표를 붙이고 사진을 찍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무얼 위해 이렇게 공을 들이느냐고 물었다. 잘 자란 나무를 표본으로 생장 환경과 조건을 조사하고 열매를 채취하여, 가장 이상적인 환경에서 우량한 수종을 육성해 내기 위해 하는 작업이라 했다.

이 나무뿐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우량한 탄생을 위해 이런 정성을 기울인다면, 그래서 세상에 우량하고 선량한 생명이 가득하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그 우량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이들이 이렇게 정성을 쏟고 있구나.

정말 좋은 일 하시고, 수고도 많으십니다.”

축복이지요! 좋은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퇴물을 불러다가 좋은 일을 시켜주니 축복 받은 일 아닙니까? 하하하!”

평생 살아온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해주니 좋고, 좋은 산 다니며 건강을 돋울 수 있게 해주니 축복 받은 것 아니냐며 다시 웃었다.

은퇴자의 축복, 아니 축복 받은 은퇴시군요!”

선생님도 마찬가지시지요.”

제가 무슨…….”

이 좋은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 사시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좋은 분들 만난 오늘 같은 날이 바로 축복입니다. 좋은 나무 만들어 주십시오. 하하하!”

서로 마음을 나누며 나무들을 측정해 나가는 사이에 또 하루해가 저물었다. 기구들과 자료를 모아 동네로 내려올 때 벚꽃이 어제보다 더욱 찬란해진 것 같았다.

다시 용역을 받아야 하겠지만, 나무의 생장 과정을 살피러, 열매를 채취하러 다시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꼭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차를 달려 나가면서 차창을 열고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이튿날 장 박사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선생님! 이번 출장 시 도움을 많이 받아 쉽게 일을 마쳤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리며 기억하고 살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언제 또 그런 축복의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했다.(201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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