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정 주지 않으리

이청산 2015. 3. 14. 10:10

정 주지 않으리

 

오늘도 나의 산을 오른다. 날마다 오르는 주지봉은 오롯이 나의 산이다. 저 소나무, 벚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노간주나무, 생강나무가 나의 것이고, 그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가 모두 나의 것이다.

언제 올라도 오르는 걸음이 가볍다. 날아오를 것 같다. 솔숲 사이로 부는 바람이 걸음을 날아오르게 한다. 바람에 살랑 나부끼는 나뭇잎이 날아오르게 한다.

산을 오르는 걸음은 포근하고 청량하다. 몰아치던 겨울 찬바람도 산에만 들면 숨이 죽어 아늑해진다. 한여름 내리쬐던 폭염도 산에 내려앉아서는 맑고 시원한 바람이 되고 만다.

날마다 걷는 걸음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단장으로 나를 반기고 있다. 볼 때마다 말갛게 씻은 듯한 얼굴, 한껏 멋을 낸 매무새로 정겹게 팔을 벌리고 손을 흔든다.

새소리는 또 어떤가. 여기저기서 울리기도 하고 그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한 소리가 되어 마치 나를 환영하는 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는 듯하다.

어느 때는 또 나를 몽롱한 꿈결 속으로 이끌기도 한다. 잎사귀며 가지들을 짙게 적시고 있는 안개가 내 몸도 진하게 적시면서 몽환의 달뜬 쾌감에 빠져들게 한다.

주지봉 저 산이 나의 산이 아니고야 내 마음을 이리도 온전히 가져갈 수 있는가. 산의 그 마음들이 이리도 고스란히 나에게로 들 수 있는가.

행복하다. 이 나무들이며 새소리, 바람소리가 모두 나의 것임에야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도 이 산의 한 나무요, 한 새소리요, 한 바람인 것 같다. 산의 한 자락인 것 같다.

, 그러던 어느 날, 내 행복의 한 자락이 무참히 베여 넘어졌다. 잘려 나갔다. 새소리가 앉을 자리를 잃고, 바람소리가 거닐 곳을 잃었다.

산판꾼들이 들이닥쳤다. 요란한 톱질 소리가 새소리 바람소리를 쫓아냈다. 나무들이 넘어지고, 십 년, 백 년의 나이테들이 초점 잃은 동공으로 하늘을 바라며 널브러졌다.

원망했다. 포근한 품이며 청량한 그늘은 어찌하라고, 사랑을 주고받던 그 달뜬 즐거움은 또 어찌하라고, 이토록 남의 행복을 야멸차게 짓밟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나를 어리석다 했다. 제 산에 나무를 제가 베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냐는 것이다. 나무 하나 못 베는 산이 왜 필요하냐고도 했다. 안타까우면 산을 사서 차지하라 했다.

제 것도 아니면서 무슨 안달이냐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니었던가. 내 것이라고, 나의 산이라고 행복해 했던 것은 부질없는 봄꿈에 지나지 않았던가.

나무를 봐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고 목재와 돈 덩어리로만 보는 사람은 걸어 다니는 죽은 사람이라고 한 어느 책 속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 말은 나를 점점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 뿐이었다.

내가 잊고 있는 게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의 그 무엇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는가. 세상은 모든 것이 무위가 아니던가. 산은 산의 것이요, 들은 들의 것이요. 모든 것이 자연의 것이 아니던가. 공연히 무엇을 가지려는 인위의 욕심 때문에 마음의 옹이만 깊이 박힐 뿐인 것을-.

민둥한 산자락엔 쓸 만한 재목은 다 실어가고 실없는 가지들만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다. 벌건 비알을 곁눈질하며, 못 본 체하며 산을 내려온다. 어떤 눈으로, 무슨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문득 노래 한 소절이 가슴을 벨 듯이 스쳐간다. 처연한 마음속일수록 잘도 파고드는 것이 노래가 아니던가.

 

……

이제는 그 누구를 다시 사랑하더라도

정주지 않으리라 정 주지 않으리라

사랑보다 깊은 정은 두 번 다시 주지 않으리

 

정에 울고 웃는 것도 또한 어쭙잖은 사람의 일인 것을-. 자연은 자연대로 있을지니, 거기에 무슨 부질없는 정을 의탁하여 저들을 사랑하고, 내 것도 아닌 것을 두고 베어낸 사람을 원망한단 말인가. 그 마음보를 어찌 다스릴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무위인 것을-.

 

그래도 나는 오늘도 내 삶의 숲정이 주지봉을 오른다. 남은 나무들은 잘 서있다. 언제나처럼 팔을 벌리고 손을 흔들며 나를 맞아주고 있다. 남아주어서 고마운 나무들이다. 새들이 잘 서있는 나무들에게로 날아든다. 반가움의 변주곡을 반갑게 들려주고 있다. 솔바람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사랑하는 이의 포근한 손결 같다.

, 저들을 내 또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이 나를 이리 사랑함에야 내 또 어찌 저들에게 정을 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저 산이 어찌 내 산이 아닐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오늘도 나는 소유되지 않는 무위를 마음껏 소유한다. 그 정을 행복해 한다.

어리석은 행복일지라도-.(2015.3.7.)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 필 날이 멀었습니까  (0) 2015.04.10
봄에는 몸이 가렵다  (0) 2015.04.01
삶의 미세기후  (0) 2015.02.21
행복할 일밖에  (0) 2015.02.09
저 산판에도 봄이 오면  (0) 2015.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