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국제시장>의 사랑

이청산 2015. 1. 15. 20:44

<국제시장>의 사랑

 

영화 <국제시장>이 개봉한 지 한 달이 채 안 되어 한국 영화 열한 번째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한촌을 살면서 영화를 좀처럼 잘 못 보고 안 보던 나까지 보았으니 그런 기록을 세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기에 대처에 나간 김에 큰맘 먹고 보게 된 것이 크게 먹은 마음보다 더 큰 감동을 가져다주었다.

<국제시장>6.25 한국전쟁 중의 흥남 철수를 모티브로 하여 피란민이 겪어야 했던 이산의 아픔과 삶의 고난을 우리나라 질곡의 현대사와 함께 엮어나가고 있는데, 진영 논리의 문제라든지 그런 이념 같은 건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극중에 전개되고 있는 삶의 모습 그 자체다.

덕수라는 인물을 역할 모델(Role model)로 삼아 부산 국제시장을 배경으로 지난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산으로 피란 온 덕수는 전쟁 통에 헤어진 아버지를 대신해 다섯 식구의 가장이 되어 고모가 운영하는 국제시장의 수입 잡화점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간다. 남동생의 대학 입학금을 벌기 위해 이역만리 독일에 광부로 떠난 덕수는 그곳에서 첫사랑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영자를 만난다.

독일에서 돌아온 덕수는 가족의 삶의 터전이 된 가게를 지키기 위해 선장이 되고 싶은 자신의 꿈을 접고 한창 전쟁 중인 월남에 기술 근로자로 가게 된다. 거기서 일하다가 총상을 입고 불구가 되어 돌아오지만, 어렵게나마 생활의 안정을 찾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에 방송국의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전란 중 헤어져 미국으로 입양 간 여동생과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 세월은 흘러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덕수도 아들, 손자가 딸린 할아버지가 된다.

설날 미국의 동생네까지 온 가족이 모여 북적대는 덕수네 집은 어린 손주들의 재롱으로 한껏 분위기가 고조되는데, 덕수는 혼자 안방으로 들어간다. "네가 이제 가장이다."하면서 아버지가 입혀주던 외투를 꺼내놓고 영정을 바라보며 아버지, 저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저 진짜 힘들었거든예!”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 이르러 영화는 절정에 오른다.

관람 중에 몇 번이나 눈시울을 적시었을 관객은 이 장면에서 또 한 번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 눈물은 곧 공감이고 감동일 것이다. 그 공감이며 감동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한국인이면 누구나 겪어내어야 했던 지난한 삶이었다는 사실이 커다란 공감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 고난의 삶과 질곡의 역사를 꿋꿋이 이겨가는 삶에의 의지와 집착, 그 가운데 극적으로 찾아오는 희열의 순간들이 감동을 일으키게 했을 것이다.

나는 그 감동들은 사랑에서 온 것이라 말하고 싶다. 나아가 <국제시장>의 중심 주제도 바로 사랑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예술작품에서 사랑을 주제로 삼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고, ‘사랑은 예술작품의 영원한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모습은 작품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국제시장>의 사랑은 사람에 대한 사랑,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는데,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는 다른 사람 즉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극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어쩔 수 없이 가장이 된 덕수는 가족들의 삶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꿈은 포기를 하고, 독일 광부로, 월남 전쟁터로 전전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게 되는데, 이 모습을 두고 아내는 왜 당신은 자신을 위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남을 위해서만 사느냐.”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덕수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기가 잘 사는길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그 시대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 뜨거운 인간애의 발현이었다.

덕수에게는 오직 가족을 위한 헌신 일념밖에, 이타적인 사랑밖에 없었을까?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삶을 돌아볼 줄은 몰랐을까? 나는 영자와의 만남에서 덕수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을 엿본다. 덕수와 영자는 독일서 광부와 간호사로 만나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면서 따뜻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나눈다.

누구를 사랑할수록, 특히 이성을 사랑할수록 자신에 대한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다. 자신에 대한 사랑 없이 남을 사랑하는 것은 허욕의 신기루거나 허망한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에 대한 사랑일수록 먼저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여 이타적인 사랑으로 승화할 때 비로소 고결한 사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을 위한 덕수의 헌신적 행위도 감동적이지만, 힘들고 외로운 이국땅에서 만난 덕수와 영자의 아름다운 사랑도 아릿한 감동을 준다. 가족을 위한 희생도, 영자에 대한 애정도 덕수에게는 모두가 사랑이었다. 그것은 이타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기도 했다. 그 사랑의 힘이 파란 많은 가족사를 이겨내게도 하고, 영자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가꾸게도 했다.

<국제시장>에는 감동적인 장면도 많지만, 노경의 덕수와 영자가 지난날을 회상하며 주고받는 이 대사가 특별히 깊은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덕수 : 그라믄 니는 꿈이 뭐였는데?

영자 : 저는 멋진 남자 만나서 행복한 가정 이루는 거.

덕수 : 축하한다. 너는 완벽하게 꿈을 이뤘뿐네.

영자 : 나는 그래 생각 안하는데.

덕수 : 와 후회하나? 내하고 결혼한 거.

영자 : 그라믄 당신은 왜 나랑 결혼했어요?

덕수 : 이쁘니깐.

영자 : 거짓말이라도 듣기는 좋네.

덕수 : 그라믄 니는 내하고 왜 결혼했는데?

영자 : 사랑하니깐.

덕수 : 거짓말이라도 듣기는 좋네.

 

얼마나 따뜻하고 여유롭고 재미있는 말인가. 덕수든 영자든 자신에 대한 사랑 없이, 서로에 대한 사랑 없이 이토록 여유롭고 따뜻하게 지난날을 회고할 수 있을까. 이쁘니까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결혼했다는 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그들은 그랬다. 그들은 결혼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굳세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대화는 그 사랑의 산물이다. 어쩌면 <국제시장>은 이 대사와 함께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하소연하던 덕수의 말을 들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부부싸움 중에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그 바탕 또한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국제시장>의 주제는 역시 사랑이다. <국제시장>을 영어 제목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송가(Ode to my father)’라 했다지만, ‘사랑에 대한 송가(Ode to my love)’라고 하면 어떨까. 나에게는 그 모든 영상들이 곧 사랑을 위한, 사랑에 바치는 송가로 떠오른다.

지금 그 송가가 쟁쟁히 들려오고 있다. 내 한촌의 삶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내 삶에 대한 사랑의 송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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