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신발의 여정

이청산 2014. 12. 24. 15:46

신발의 여정

 

오늘도 걷는다. 강둑이며 들길을 소요하는 아침 산책길을 걷고, 숲속을 들어 마루를 등정하는 해거름 산길을 걷는다. 날마다 걷는 나의 걸음이다. 어쩌다 먼 나들이라도 하는 날에는 한참을 걸어 나가 차를 타고, 차를 내려서는 볼일이 있는 곳까지는 다시 걸어서 간다.

내 걸음이 어찌 이뿐일까. 생각해 보면 내 삶이란 곧 걸음의 여정이었다. 한적한 시골 고샅도 걷고, 분주히 흘러가는 도회의 번화가도 걷고, 후미진 돌밭 길도 걷고, 난바다 한가운데의 고적한 섬 길도 걷고, 가쁜 숨 몰아쉬며 오르는 가풀막도 걷고, 풀꽃이 길동무해 주는 정겨운 길도 걷고, 이국 땅 낯선 길도 걷고, 때로는 아귀다툼의 수라장 같은 길도 걷고 걸었다.

누군들 길이야 걷지 않으랴만, 내 한생 살아오는 동안 발과 땅이 함께 했던 시간들이 어떤 이들보다도 많을 것 같다. 그 가장 큰 까닭은 이러저러한 사유로 자동차를 몰지 못하고 몰지 않는데 있지만, 그리하여 많이 걷다가 보니 어느새 걸음이 곧 나의 삶이 되어버렸다.

오늘도 삶의 길을 걷고 있고, 길의 삶을 살고 있다. 걸음으로 삶을 엮고 있고, 엮고 있는 삶으로 또 걷고 있다. 걸음들을 돌이켜 본다. 내 걸음은 내가 걷는 것인가. 아니다. 신발이 걷고 있다. 자동차가 사람을 태우고 다니듯이 내 신발이 나를 태우고 다닌다. 자동차가 행로를 틔워주듯이 신발이 나의 행로를 틔워준다. 그 행로를 따라와 지금 내가 여기에 살고 있다.

자동차가 편리하다 하나 다닐 수 없는 곳도 많지만, 내 신발은 나를 태우고 다니지 못할 곳이란 거의 없다. 내가 가고자 하는 어떤 곳이든 신발은 나와 함께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걷기 좋은 평탄하고 순편한 길보다는 거칠고 험한 길을 더 많이 걸은 것 같다. 운명처럼 그렇게 걸어 왔다. 내가 그 험로를 걸을 때, 나의 신발은 또한 얼마나 험난을 겪었을까. 어쩌면 내 육신의 간고보다 더 큰 고난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신발은 말이 없다. 다만 닳아져 가고 해어져 갈 뿐이다. 숙명으로 순명으로 여길 뿐, 오직 나를 위해 충직한 생애를 살 뿐이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져 갈 뿐이다. 나는 내 신발처럼 누구를 위해 묵묵한 이바지를 해 본적이 있던가. 신발의 이바지 한생을 나는 얼마나 기려 보았는가.

일본 도쿄의 미나미센주 지역에는 신발을 만드는 장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발 축제4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축제가 열리는 날이면 사람들은 낡은 신발을 동네 신사로 가져와 신발 더미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그동안 고생한 신발에 감사하면서 목례로 이별 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이 때 신사 주변은 장터가 이루어져 새 신발을 싸게 파는 노점상이 늘어서고, 인파 사이로 축제 가마가 지나가면서 분위기를 돋우는데, 신발 축제답게 가마 역시 거대한 신발 모양이라 한다.

신발의 수고와 희생을 기리는 의식이라 하겠다. 내 신발의 수고가 돌아 보인다. 당연한 것인 줄만 알았다. 나의 걸음을 위해, 나의 편리를 위해, 나의 장식을 위해 당연히 기여하는 것이고, 늙고 낡아 쓸모가 없어진 헌신짝은 당연히 버려지는 것인 줄 알았다.

어느 나라 어떤 곳에 그런 축제가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어느 시인의 이런 시가 있을 줄도 몰랐다. 시인은 신발이 끌고 다닌 수많은 길과/ 그 길 위에 새겼을 신발의 자취들은/ 내가 평생 읽어야 할 경전이다.”(김경윤, ‘신발에 대한 경배’)라 했다.

그랬다. 신발이 있었기에, 나는 길고도 많은 길을 걸을 수 있었고, 그 길에 나의 숱한 자취들을 새길 수 있었고, 희로애락의 삶을 점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를 존재케 하고도 아무런 말이 없는 신발은 내가 평생 읽어야 할 경전임에 틀림없다.

, 어찌 신발만이랴. 나의 길을 걷게 한 것이, 나를 존재케 한 것이 신발만의 일이랴. 닳고 해져가는 내 신발을 보면서,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그 그리움과 사랑의 힘으로 오늘도 나는 걷고 있고, 존재해 가고 있지 않은가. 신발의 수고로움과 내 신발이 된 사람들에 대한 경배의 마음을 다시 모은다.

새 신을 한 켤레 샀다. 또 나와 함께 멀고도 험한 길을 갈 것이다. 그 묵묵한 수고를 신고 거친 길을 마다않고 걸을 것이다. 사랑과 그리움의 행로를 새겨 갈 것이다. 신발의 여정, 그 삶의 길을 따라-.(2014.12.22.)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시장>의 사랑  (0) 2015.01.15
치유의 산을 오른다  (0) 2015.01.11
세상에 외치는 소리  (0) 2014.12.12
가을 산의 물음  (0) 2014.11.24
제자가 찾아오다  (0) 2014.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