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저 산판에도 봄이 오면

이청산 2015. 1. 28. 10:19

저 산판에도 봄이 오면

 

풍문으로 돌던 말이 눈앞의 일로 벌어지고 말았다.

언제나처럼 해거름 산을 오른다. 추위가 조금 주춤해지고 바람도 그리 차갑지 않다. 솔잎이 한결 파래보이고 낙엽 밟히는 소리가 아삭거린다. 멀리서 무슨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려오다가 새소리 바람소리에 묻혀갔다.

굽이진 가풀막을 가쁘게 올라 능선에 서면 서녘 먼 하늘에 놀이 곱게 물든다. 정상에 이르러 내려다보는 마을은 아늑한 평화에 취하여 잠든 듯 고요하다.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아이들의 장난감 놀이마냥 앙증스럽게 굴러간다.

한참 그윽함에 젖다가 산을 내려온다. 어디서 후드득 짐승이 뛰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 또한 산의 정다운 소리다. 해가 산을 넘어가면서 엷은 어스름을 풀어낸다. 간간이 들려오던 기계음도 사라지고, 삽상한 바람소리만이 산을 잠기게 할 뿐이다.

마을이 가까워질 무렵이다. ! 이 무슨 참변인가. 저 건너 자락까지 나무들이 줄줄이 베어지고 넘어져 잘려진 밑둥치만이 멀거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소나무, 산벚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밤나무, 생강나무……, 수종도, 대소도 가리지 않고 마구 베어진 채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밤이 유난히 굵던 아름드리 밤나무도 무참히 나뒹굴어졌다.

눈앞이 아득했다. ‘~’ 비명 같은 소리가 꼬리를 끌며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마치 내 몸 어디가 잘려나간 것 같고, 가슴 한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 눈부신 꽃 대궐은, 그 현란한 단풍은……!?

이태 전부터 소문이 돌았었다. 객지에 나가있는 산주 문중이 목상들과 이 산에서 산판을 벌일 일을 논의 중이라 했다. 풍문으로만 잠시 스쳐갈 뿐 한동안 잠잠했다. 바로 마을에 붙어 있는 산을 설마 벌거숭이로 만들어 놓기야 할라고?

소문이 돌던 이듬해 봄의 산에는 여느 때처럼 온갖 산꽃들이 만발하여 그야말로 울긋불긋 꽃 대궐을 이루었다. 마을은 온통 꽃에 잠겨 사람도 집도 모두가 꽃으로만 보였다. 이방의 사람들도 이 꽃 대궐을 찾아 꽃의 종류보다 더 많은 감탄사를 쏟아놓고 갔다.

봄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을의 단풍도 봄꽃 못지않았다. 봄에는 꽃이 꽃을 피우지만 가을에는 잎이 꽃을 피웠다. 아주 물색 짙은 꽃들을 찬란하게 피워냈다. 그 물색을 닮았는지 사람들의 얼굴빛도 모두들 꽃빛이다.

어찌 찬란한 꽃빛 만이랴. 여름철의 싱그러운 녹음은 어떻고, 설화가 만발한 겨울 풍경은 또 어떤가. 그 속에 잠겨드는 새소리, 바람소리는 어떻고, 그 청량감으로 세상의 모든 때들을 씻어내던 마음의 위안은 또 어떠한가.

눈부시고 찬란한 계절이 흘러가고 겨울도 한추위를 넘어가던 어느 날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풍문의 산판이 현실이 되어 터졌다. 현란하고 싱그럽고, 상쾌하고 아늑했던 계절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칠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삭풍처럼 가슴을 에고 들었다.

더욱 울연한 것은 이 참혹한 일을 마을 사람 누구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반기는 사람조차 없지 않은 듯했다. 그 많은 나무 좀 쳐내면 어떠냐고 했다. 저렇게 나무들을 쳐내면 봄철에 나물들이 많이 나서 좋고, 남의 권리 행사를 두고 왈가왈부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산 아래 밭 임자는 벌목 차가 다닐 길을 내어주기도 했다.

고샅에는 통나무들을 실은 차들이 분주히 오가고, 사업주가 마을회관을 찾아와 협조에 감사한다며 희사금을 내놓기도 했다. 마을사람들 중에는 사업주에게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다. 나의 안타까운 마음은 한갓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이 마을이 좋다며, 사랑스럽다며 두그루부치기 한 생애를 의탁하여 살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집 뒤의 저 산이 좋고, 집 앞의 저 물을 사랑해서가 아니던가. 이제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에 마음을 걸어야 할까.

톱질 소리는 며칠을 두고 계속 산을 들쑤셨다. 산자락을 오르내리며 베어진 나무를 옮기고 싣는 굴삭기며, 통나무를 실어 나르는 트럭 바퀴 자국이 점점 깊고 넓게 패여 갔다. 톱은 나무만 베는 게 아니었다. 굴삭기며 트럭의 바퀴 자국이 산에만 패는 게 아니었다. 내 몸 한 곳에도 그 자국들이 깊이 박히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참으로 다행히 온 산을 다 베지는 않는다고 했다. 동네에서 바라보아서는 잘 안 보이는 골짜기의 나무들을 중심으로 베어낸다고 했다.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 할까. 그만해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긴 한숨 속으로 스며든다.

내가 산을 오르는 길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다가 산마루를 내려서서 산 아래턱에 이를 무렵에 베어낸 자리가 훤히 드러나 보인다. 그러면 그 때만 마음 아파하면 되겠구나. 성했던 날의 기억을 거기를 지날 때만 새김질하면 되겠구나. 아린 위로였다.

다른 도리가 없다. 어서 세월이 흘러 풀이 돋든 나무가 자라든 다시 푸른 숲으로 우거지기를 고대할 일 말고는 무슨 방도가 있단 말인가. 세월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도 하지만, 다시 나고 자라게도 하지 않는가.

다윗왕의 반지에 새겨 넣은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라는 솔로몬 왕자의 말을 상기한다. 기쁨도 희망도 지나가는 것이지만, 아픔도 절망도 때가 되면 지나가는 것이 아니던가. 언젠가는 저 민둥한 산자락에도 잎이 나고 꽃이 필 날이 오지 않으랴.

오늘도 아침 강둑으로 산책길을 나선다. 윤슬을 반짝이며 맑은 소리로 흐르는 물을 보다가 문득 고개가 돌려진다. 동네에서는 보이지 않던 산골짜기가 먼발치로 보이면서 부스럼 같은 자리가 빼족이 드러난다. 가는 한숨을 날리며 못 본 채 고개를 돌린다. ‘봄이 오면 저 산판에도 잎이 나고 꽃이 피겠지.’

산 그림자를 안고 흐르는 강물이 중얼거리는 내 말을 들은 듯 저도 따라 중얼댄다.

봄이 오면 잎이 나고 꽃이 필거야-!”(2015.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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