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은퇴자의 명함

이청산 2015. 1. 21. 13:57

은퇴자의 명함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흘러 쌓여가는 세월 속에 두그루부치기 나의 삶도 해를 거듭해 간다. 어느 날 나는 한 생애를 마감하고 연극이 끝난 배우가 무대를 내려가듯 그 삶의 자리를 내려왔다. 세속의 모든 일을 다 내려놓았다. 나를 따라다니던 지위며 직함 같은 것들과도 미련 없이 결별했다.

그것은 때가 되면 막을 내려야 하는 제도 때문이지만, 순명하려는 내 의지도 여리지 않았다. 아쉬움도 안타까움도 없었다. 그렇게 홀가분히 자리를 내려오던 날, 예약해 놓은 탈것을 타듯 정해 놓은 새 삶의 터를 향하여 훌쩍 떠나왔다.

가슴 벌려 나를 맞이하는 건 푸른 산과 맑은 강이었고, 그런 나를 위해 축가를 불러주는 것은 바람소리 새소리였다. 그 가운데 조그만 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에서 세 끼 밥을 먹으며 강둑을 걷고 산길을 오르며 바람소리 새소리와 더불어 살고 있다.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를 번잡하게 만들었던 지난날의 모든 것들은 시나브로 잊혀져가고, 메모장에 빼곡히 적혀있던 이름들도 한둘씩 스러져갔다. 심지어는 내 이름도 잊을 지경이었다. 부를 일도, 불릴 일도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온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사람으로 숨을 쉬고 있음에야 어찌 사람의 세상을 온전히 모른 체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은퇴한 삶일 뿐이다. 은퇴를 영어로는 리타이어(retire)’라 한다지 않는가. 타이어를 새로 갈아 끼운다는 뜻이다. 은퇴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란 말이다.

숲속의 바람과 더불어 지내는 날의 어느 하루는 대처로 나가 그리운 친구도 만나고, 친구의 친구도 만난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도 해보면서, 그런 일들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들을 만나 마음과 뜻을 서로 나누기도 한다. 앞의 생애에서 누리기 어려웠던 은퇴의 새로운 삶이다.

사람들을 만난다. 손을 잡으며 이름을 주고받는다. 잠시 스치는 인사로 이름이며 인연 이을 곳을 어찌 또렷이 새겨둘 수 있을 것인가. 그 때 필요한 것이 명함이다. 명함 한 장이면 간단히 인상 깊은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일이다.

, 그런데 무어라 명함을 새겨야 하나. 이름만 달랑 얹어놓아 될 일인가. 지난날 이름자 위에 덩그렇게 얹어놓던 직함이, 그런 걸 쓸 수 있는 시절이 새삼스레 돌아 보이기도 했다. 어느 문화심리학자는 한국 남자들에게 남들 앞에 내밀 번듯한 명함이 사라지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일은 없다.”라고 했지만, 공포스러울 정도는 아니더라도 불편스런 느낌은 없지 않다.

그 불편감은 나만의 느낌은 아닌 듯하다. 어떤 이는 은퇴 생활의 한 방편으로 문화 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관여하는 문화단체에서 명함에 얹을 만한 자리 이름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혹 어떤 이는 화가, 시인, 소설가 등의 문화적 신분을 이름 앞에 내세우기도 한다.

문화심리학자는 또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길 원한다. 남들이 알아봐 주는 것 자체가 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과거와 현재의 화려한 경력을 아로새긴 이력서 같은 명함을 내밀기도 한다.

명예와 권력을 선망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라 하더라도, 그런 명함을 받을 때면 권력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명예와 권력이 사람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쫒지 못해 발버둥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느낌마저 든다.

물론, 책임 있는 자리에 명예롭게 추대되거나 뽑힌 사람이 활동의 편리를 위해 그 직함을 얹은 명함을 건네는 일에까지 흠잡을 수는 없다. 그래서 명함이 필요한 게 아닌가.

언젠가 정호승(鄭浩承) 시인을 만나 명함을 받은 일이 있다. 하얀색 명함에는 위쪽에 한글과 한자로 이름을 적고 그 아래에 휴대폰, 이메일, 주소만을 간략하게 적어놓았을 뿐이다. 이름 위에 얹을 적절한 직함이 없어서인지, 굳이 무어라 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그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신문과 인터뷰에서 한 말을 들어보면 그의 뜻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은사인 조병화 선생의 산문 중에 '시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살아가는 데 조금 위안이 될 뿐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그 말씀에 굉장히 공감해요.”라고 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아닌 시를 쓰면서 무어 그리 자신을 보란 듯이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겸덕을 보인 것이 아닐까. 실제로 나는 정 시인에 대해 매우 겸손하고도 소박한 사람이라는 인상과 느낌을 가지고 있다.

직함이 없으면 어떤가. 명함이 왜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어야만 하는가. 이름이며 소식 주고받을 곳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을까. 명함의 본래 사명이란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데 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이제 내 명함 새길 일만 남았다 사회적인 지위가 없으니 이름 위에 둥실하게 얹을 직함이 없지만, 자랑스러운 게 없는 건 아니다. 자랑스럽다기보다는 사랑스럽다 할까. 배산임수로 앉아 있는 나의 조그만 집 청우헌(靑遇軒)’이다. 늘 푸르게 살고 싶어 붙인 이름이다.

나는 이런 곳에 살고 있소.’하고 큼지막이 올린 집 이름 밑에 내 이름을 새겼다. 또 하나 나의 집 홈페이지 도메인도 새겨 넣었다. 혹 은근히 과시욕을 부린 거라며 실소할 사람은 없을는지-.

어쨌든 나는 아침이면 동창으로 들려오는 새소리에 잠을 깨고, 남창에 비쳐오는 푸른빛으로 눈을 씻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내 사랑 청우헌에서-.

그리고 한 주에 한 번쯤은 세상을 만나러 간다.(20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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