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가을 산의 물음

이청산 2014. 11. 24. 22:47

가을 산의 물음

 

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날마다 노을을 뿌리는 해를 바라며 걷는 산행이요, 산책길이다. 요즈음은 오를 적마다 노을이 산자락 아래쪽으로 조금씩 내려와 있는 걸 보니, 해가 시나브로 짧아지고 있는 모양이다.

색바람인가 싶더니 어느새 찬바람 되어 불면서 산속에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나무들은 맨살을 드러내고 비알에는 낙엽이 자욱하다. 발길에 닿은 낙엽 소리가 귓불에 맴도는 정다운 이의 속삭임 같다.

빈 가지에 새잎이 돋아 무성하다가 낙엽 되어 떨어져 다시 새잎을 준비하고-. 이런 순환의 법칙이 언젠들 다르랴만, 그 자연의 이법 속에서 올 가을에도 어김없이 낙엽이 지고 있다. 저 잎은 왜 떨어지고 떨어진 갈잎은 어디로 가는 걸까.

지금처럼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줄기의 수분 보존을 위해 줄기와 잎자루 사이에 떨켜[離層]가 생겨나 줄기에서 잎으로 가는 물길을 막는다고 한다. 수분을 공급 받지 못하는 잎은 마르게 되고, 마른 잎은 낙엽이 되어 땅으로 지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저들이 운용하는 엄연한 생존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지는 것이 있고서야 새로운 것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에서의 세대교체와도 같은 것이라 할까. 떨어지는 것은 물론,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예비하는 것이겠다.

나뭇잎은 떨어지는 것만으로 새 생명의 탄생을 돕는 것은 아니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 했다. 떨어진 잎은 땅을 덮어 겨울 찬 기운에 뿌리가 어는 것을 막아주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곱게 썩어 나무의 생장을 위한 기름진 거름이 된다.

대부분의 활엽수 잎들은 마르면서 떨어져 한 세상을 미련 없이 마치는데, 한껏 말라 흉측한 모습을 하고서도 끝내 떨어지지 않고 바둥바둥 달려 있는 저 참나무 무리며 단풍나무 잎들은 무얼 어쩌자는 건가. 무슨 배알 없는 노추(老醜)란 말인가.

이들의 사연을 알고 보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지에 붙은 넓적한 잎자루 끝자락으로 여린 겨울눈을 싸안아 설한풍을 방비해 주다가 새봄이 와 싹이 날 무렵이면 할 일이 끝났다 하고 뚝 떨어진다. 이 또한 얼마나 숭고한 본능이요, 고귀한 희생인가.

이런저런 낙엽의 모습이 내 삶의 시계를 들여다보게 한다. 한 세상을 마감하고 두그루부치기를 하고 있는 처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나는 겨울을 맞는 나무의 떨켜 세포층 어름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멋지게 떨어져서 좋은 거름이 되어야 할 일만 남았는가.

, 그런데 저 푸른 솔잎은 또 무엇인가. 떨켜 없이도 냉한 몰아치는 겨울을 잘 나서, 예부터 추위가 닥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시들어 떨어지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며 그 절조를 감탄해 마지않았던 그 나무-. 이 나무의 푸름 속에도 아주 비밀스런 자연의 이법이 숨어 있음을 알면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소나무는 겨울이 가까워지면 마치 부동액을 준비하듯 세포에 프롤린(proline)이나 베타인(betaine) 같은 아미노산이며 수크로오스(sucrose) 같은 당분 등의 유기물을 저장하여 월동 채비를 갖춘다고 한다. 솔잎의 세포질에는 얼음 결정이 생기지 않고 세포와 세포 사이의 틈새에만 얼음이 맺히는데, 세포질 안의 물을 밖으로 계속 빨아내어 세포 틈새의 얼음알갱이를 크게 키운다. 세포질 안의 물을 빨아낼수록 세포액의 농도가 짙어지고 세포에 유기물이 잔뜩 걸쭉해지면서 빙점이 낮아져 잘 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솔잎이 늘 푸름을 유지하는 까닭이다.

저들이 무엇의 조화로 이렇듯 신비로운 생명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사뭇 경외감을 금할 수 없다. 떨켜의 원리에 순응해서 한 세상을 마치는 것도 자연의 숭엄한 질서지만, 저 솔잎처럼 쉽사리 생명력을 잃지 않는 비법을 알아 푸름을 지켜나가는 것 또한 자연의 지혜로운 이법이 아니랴.

내가 매일같이 이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근력을 기르고 심장을 맑게 하려는 것이 저 소나무가 차고 시린 겨울을 잘 나기 위해 영양분을 담금질을 하는 것이며, 세포 사이에 얼음알갱이를 키워 푸름을 지키게 하는 생명 작용과도 같은 것이기를 바라고 싶다.

저 푸른 솔잎도 언젠가는 마른 솔가리가 되어 뿌리로 다시 돌아가듯이, 나도 그렇게 자연의 철리에 순응해 가다가 천명을 다하는 날 아무런 걸림 없이 돌아가야 할 자리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삽상하고도 풋풋한 생애가 되랴.

그러고 보면 하나하나의 나뭇잎은 태어나서 무성하다가 마른 잎이 되어 떨어지는 한생의 역정을 새겨가면서 한 순간도 허투루 짓는 일이란 없다. 생사의 숭고한 업을 위해 시기마다 철마다 해야 하고 해내어야 할 일이 있고, 그러한 일들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행해 가고 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해내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저 나무에게 저 잎들에게 물어보아야 할까. 오늘따라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에 전해오는 정감이 여느 날 같지 않다. 발길에 닿는 낙엽소리가 한껏 정겹다 싶으면서도 나를 향해 무언가를 목청 돋우어 되잡아 묻고 있는 것 같다.

발목을 파묻는 내리막길의 낙엽이 발길에 미끈대며 걸음을 잡는다. 미끄러져 벌렁 드러누워 이 포근한 낙엽 더미에 푹 잠겨도 보고 싶다. 새봄이 올 때까지, 이 가을 산에서-.(2014.11.15.)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발의 여정  (0) 2014.12.24
세상에 외치는 소리  (0) 2014.12.12
제자가 찾아오다  (0) 2014.11.16
부부목  (0) 2014.11.10
계절 여행  (0) 2014.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