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계절 여행

이청산 2014. 10. 30. 12:05

계절 여행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다. 지난했던 지난 생애를 내려놓고, 몸 담았던 도시도 내려놓고 이 여행지로 왔다. 내가 행장을 꾸려 여행을 나설 때는 그리 큰 결심이 필요하지 않았다. 풀잎도 이슬방울도 귀하던 도시를 떠나는 일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꿈꾸어 왔었기 때문이다.

그 여행이란 또 하나 나의 삶이었다. 물론 처음의 여행은 아니다. 나는 오랜 동안 여행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의 여행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내 발길을 내 마음대로 옮겨놓기가 어려운 걸음을 많이 걸어왔다.

내가 걷는다기보다는 걸어주는 걸음, 걸어주어야 할 걸음을 걷는 일이 많았다. 그 때마다 나는 믿었다. 이렇게 걸어주어야 길의 끝에는 반드시 내 스스로 딛고 싶은 곳을 딛고, 걷고 싶은 곳을 걸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드디어 그 날이 왔다. 비록 푸르던 한 세월이 가버린 후였지만, 그래도 내 믿음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이루어질 믿음을 향하여 나는 묵묵히 걷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리가 아프고 배낭이 힘에 겨울 때는 몇 모금의 물과 술로 곤비한 시간들을 달래기도 하면서 걸었다.

믿음과 꿈의 끝자락에서 한 생애가 나를 떠나갔다. 미련 없이 보냈다. 그런 날이 오기를 고대했었고 올 것임을 알고 있었음으로-. 미련 없는 한 생애가 훌쩍 떠난 날, 나는 아주 가볍게 배낭을 걸머지고 여행길에 나섰다. 내가 걸을 수 있는 나의 길을 찾아, 다시는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을 여행지를 찾아 나섰다. 내가 좋아 걷는 길이라면 등짐이 좀 무거운들 어떤가.

이 게 웬 행운! 믿음과 꿈이 공고했기 때문이었을까. 그 여행지가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한 듯 성큼 나에게로 다가와 주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John Campbell 1904~1987)여러분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곳, 거기에 보물이 묻혀 있다.’라고 했지만, 내 발길 아래에 바로 보물이 있을 줄이야.

나의 여행지는 산이 있고 물이 있고 바람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여행지가 좋다. 더 좋은 것은 그 산과 물, 바람 속에 계절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동안 나는 계절을 많이 굶주리면서 살아왔다. 이제 나는 계절 속을 스스럼없이 걷는다. 욕심도 속박도 없는 무위의 길을 걷는다.

아침이면 강둑을 걷고 들길을 지나며 맑은 물소리와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길섶의 꽃들과 정겨운 인사를 주고받는다. 마치 시를 읊듯 흘러내리는 강물은 언제나 맑고 푸르다. 나도 이따금 즐겨 낭송하는 시로 화답해 준다. 꽃다지며 황새냉이, 개망초며 물봉선, 유홍초며 달개비꽃, 쑥부쟁이며 마타리, 철마다 새로운 꽃들이 반겨주는 수풀 우거진 길을 걷노라면 눈길이 참 분주하다. 어느 꽃과 먼저 눈을 맞추어야 하랴.

들길을 걷는다. 검은 들판이 가슴을 열면서 파릇파릇 생명의 기운을 틔워가다가 생명의 활기가 넘쳐나면서 어느새 싱그러운 초원을 이룬다. 나날이 푸름을 더해 가는가 싶더니 팬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들판은 온통 황금이 넘쳐난다. 요란한 수확기 소리와 함께 드러누운 황금은 알갱이 금이 되어 들길에 오른다. 햇빛에 반짝이는 순도 높은 금이 되어 햇살 맑은 하늘을 바란다. 이 때 나는 참 부요해진다. 모두 나의 금인 것 같다.

들판에서 바라보는 산 풍경은 진지하고도 아름답다. 모든 걸 쓸어내고 새 출발하는 용사처럼 하얀 발판 위에 우뚝 선 나무들, 물소리 새소리와 함께 청년 같이 푸른 손을 뻗다가, 어디에 갈무리해 두었던 물씨들인지 찬란하게 눈부신 빛깔의 잔치를 벌인다. 저 빛깔을 위해 그렇게 무성한 손들을 뻗고 벌였던가. 저 나무 한 잎 속에 계절들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 같다.

산으로 든다. 곧거나 굽거나 휘거나 저마다의 모습으로 서 있는 나무들이지만 모두 나를 향해 환영의 손길을 뻗고 있는 것 같다. 나를 위해 열병식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저 명징한 새소리들은 또 무엇인가. 나를 환영하는 주악 아닌가. 나무들의 열병을 받으며 새소리 주악을 들으며 산을 오르노라면 나는 계절의 배가 아주 포만해진다.

지금 나는 깊은 가을 속을 여행하고 있다. 가을의 날들은 나를 분주하게 했다. 마치 저의 있음을 알리려는 듯 툭,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밤이며 도토리가 산을 오르는 내 걸음을 바쁘게 했고, 잎 다 진 나무에 장식등처럼 총총 달려 있는 붉은 감이 내 손길을 바쁘게 했다. 이 무슨 욕심인가. 열매들의 고혹적인 유혹을 이길 수가 없다.

열매들이 다 떨어지고 나면 마침내 겨울이 올 것이다. 겨울은 사려에 찬 모습으로 봄을 예비하면서 꽃과 잎을 피울 준비를 부지런히 할 것이다. 잎들과 꽃들이 피는가 싶으면 들판은 다시 생명의 기운이 넘치고, 푸름이 무성해지고, 빛깔의 향연이 펼쳐지고, 순백의 무구한 세상이 되고-.

나는 기쁘게 가쁘게 펼쳐지는 계절을 두고 한눈 팔 겨를이 없다. 계절의 질서를 닮아갈 수밖에 없다. 계절과 한 몸이 될 수밖에 없다. ‘햇살과 한 몸이 되기를 바랄 뿐’(정호승, ‘이슬의 꿈’)인 이슬처럼 그 꿈처럼, 그렇게 계절과 한 몸이 되어갈 수밖에 없다. , 그 계절 속으로 나의 허정한 그림자를 거두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 삶도 한 계절 여행이 아니던가.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다. 돌아갈 수가 없는, 돌아갈 필요가 없는, 돌아가는 것도 없고 돌아가지 않는 것도 없는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느 시인은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정호승, ‘여행’)이라 하였지만, 내가 여행할 수 있는 곳은 내 마음의 계절뿐인 것 같다. 그 무위의 계절 속으로-.

나의 여행지가 좋다. 계절이 풍요로운 나의 여행지가 그립게 좋다.(201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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