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부부목

이청산 2014. 11. 10. 08:04

부부목

 

부부가 서로 사랑을 나누며 평생 해로하는 일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지, ‘황혼이혼신혼이혼의 비율을 능가하고 있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들린다. 신혼이혼이란 결혼한 첫 해부터 4년 이내에 이혼하는 것을 말하고, 황혼이혼이란 20년 이상 부부로 지내다가 이혼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한다. 거의 반평생 혹은 그 이상을 함께 살다가도 미련 없이 서로의 갈 길을 가버리는 인정세태가 안타깝고도 무상하다.

비익연리(比翼連理)’라는 말이 있다. 비익조와 연리지라는 뜻으로, 아주 화목한 부부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당 시인 백거이(白居易)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在天願作比翼鳥),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在地願為連理枝)’라며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에서 나왔다. 이에 연유하여 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연리지(連理枝) 나무를 부부목(夫婦木)으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부부목으로 널리 알려진 나무도 있다. 장미목 콩과의 낙엽소교목인 자귀나무다. 이 나무는 6~7월에 머리카락 모양의 연분홍색 꽃을 피우는데, 밤이 되면 양쪽으로 난 잎을 서로 포개고 정답게 짝을 이루어 잠을 잔다. 이 모습이 금슬 좋은 부부 같다하여 부부목 또는 합환목, 합혼수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엔 서로 정답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혼부부 집에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낮 동안에는 서로 떨어져 있다가 해가 지자마자 제 짝을 찾아 정답게 마주하는 잎의 생리를 보며 부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을 성싶다.

강화도 고려산 적선사에 가면 수령이 400년 이상은 되었을 거라는 느티나무 노거수 두 그루가 서 있는데, 한 그루의 밑둥치가 여인의 젖가슴 형상을 하고 그 옆에 같은 뿌리로 붙어있는 둥치의 밑자락 한쪽이 영락없는 태중(胎中) 아기 형상을 하고 있다. 그 곁에는 또 한 그루 노거수가 이 나무를 지키며 의젓이 서 있어 이들을 부부목이라 이른다고 한다. 그 옆에는 ……이를 일러 부부목이라 이름하니/ 이곳을 스치는 인연이여!// 그대 곁 나여서 한없이 미안해지고/ 내 곁 그대여서 한없이 고마워하며// 적석사 법당 앞 수수백년 지켜온 부부목 닮아/ 부디 부디 행복하게 해로하시라.”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이를 보면 마치 부부의 연을 맺어 태어났을 듯한 그들의 생김새가 자연의 우연한 조화만은 아닌 듯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경주 불국사에 가면 최근에 발견된 아사달 아사녀의 사랑의 나무가 있다. 불국사 일주문에서 천왕문을 지나 영지(影池)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 단풍나무 숲길로 올라가다가 보면, 수령이 200여 년쯤 된 소나무와 느티나무의 뿌리가 마치 남녀가 정염을 불태우고 있는 듯한 연리근(連理根)으로 얽혀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자태가 너무도 열렬하고도 애틋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아 영지에 어려 있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하여 사랑의 나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서로 엉겨 있는 자태를 보면 실로 한갓 나무들의 무심한 생태로만 그렇게 맺어져 있는 것 같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렇듯 나무들에게도 인연이 깃들어 있고, 사랑과 애탐도 있는 것일까. 내가 늘 오르내리는 산에도 서로 애련의 삶을 엮어 가고 있는 듯한 나무들이 있어 홀로 걷는 산길을 한결 정취에 젖게 한다. 호젓한 산길에 소나무, 산벚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노간주나무, 생강나무 등 온갖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서로 얽혀 서있는 한 쌍의 소나무와 산벚나무가 눈길을 끈끈히 잡는다.

수령이 백 년은 넘었음직한 두 나무가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비바람을 같이 겪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벚나무와 뿌리를 함께 하고 솟아나온 소나무는 점잔을 빼듯 아니면 무슨 심술이 난 듯, 잠시 둘 사이를 슬쩍 벌리다가, 오직 한 사랑 벚나무의 지성에 감격한 듯 은근 다시 다가서자 벚나무는 너그러운 몸짓으로 소나무에 넌짓 기대며 다정히 팔을 내민다. 두 나무의 가지가 하도 가깝게 밀착되어 한 몸에서 나온 것 마냥 붙어버렸다.

어쩌면 이들은 서로 부부의 연을 맺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뿌리를 같이하여 살아가면서 한 때는 세상에 그보다 더 가까울 수는 없을 듯이 마음과 몸을 다 섞다가, 알 것 알았다며 조금은 경원시하는 즈음도 가지다가, 그래도 당신밖에 없다는 듯 다시 마음을 한 데 모으는 부부의 인생 역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부부되어 평생을 함께 살다가 보면 무슨 일인들, 무슨 사연인들 없을까. 사랑스러울 때도 미울 때도 있고, 상큼하게 다가올 때도 미욱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지니, 그런 마음과 생각이 씨금 날금처럼 교차하는 가운데 세월 인연을 엮어 가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키우는 게 운우(雲雨)의 정이 아닐런가.

부부 사이가 마음처럼 뜻처럼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면, 속을 끓이고 애만 태울 것이 아니라 집안에 자귀나무를 하나 들여 놓으면 어떨까. 아니면 강화도 적선사로 가서 부부목을 보며 양팔 활짝 벌리고 숨을 크게 쉬어 보든지, 불국사 영지로 달려가 사랑의 나무를 가슴에 새겨보면 어떨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늘 다니는 산길로 와 보시라. 한 곳에 뿌리를 박고 서로 기대며 우뚝 솟아 있는 나무를 보며 그 나무가 되어 보시든지-.

그러는 당신은 살뜰한 금슬로 잘 살고 있느냐고? 난들 어찌 한생을 마음 맞추고 뜻 맞추어 반듯하고 따뜻하게만 살 수 있으랴. 때로는 부부목을 우러르며 나의 산길을 쓸쓸히 걸을 적이 왜 없을까. 그렇게 보란 듯이 살고 있는 사람 또한 얼마나 되랴.

지금 세상에는 연금 개혁 문제로 시끄럽다. 고치려는 법조문 중에는 부부가 갈라 설 때는 연금도 절반씩 나누어가지게 하려 한단다. 권리를 동등하게 지켜 주는 것에야 무슨 몽니를 부릴 수 있으랴만, 갈라서기를 한결 쉽게 하는 촉매가 되지는 않을는지-.

이래저래 부부목이 그립다. 오늘도 부부목이 의젓하고 정답게 서 있는 나의 산길을 익은 걸음으로 오른다.(20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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