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황금 들판

이청산 2014. 10. 18. 15:26

황금 들판

 

한로가 지나 상강이 다가오는 들녘에 서면 논들은 바야흐로 황금 들판이다. 저 질펀하게 출렁이는 금들은 어디에서 저렇게 와르르 쏟아져 나온 것일까.

현란한 축복 같은 금으로 가득 차 있는 논들을 바라보는 농부들은 세상에 다시없는 부자다. 누가 이 많은 금들을 소유할 수 있으랴. 그 유족에 젖을 수 있으랴.

그 넉넉한 마음과 함께 황금빛 들판을 본다. 볼수록 입가에 미소가 돌게 하는 빛이다. 금을 탐하는 마음 때문일까.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들판 한가득 금빛으로 가득 차 있는 논들이지만, 그 빛을 자세히 보면 논마다 다 같은 빛은 아니다. 짙고 옅기가 조금씩 다른 노란색, 누런색, 황갈색 들이 보인다. 더러는 아직도 초록빛 잎새가 남아 노랗고 누런빛을 돋우어 주기도 한다.

아마도 봄에 모 심는 시기가 조금 이르고 늦었거나, 비료며 거름을 먹이는 양이며 종류가 조금씩 달랐거나, 물꼬 열고 닫기를 달리 조절을 했거나, 아니면 품종에 따라 빛깔들이 조금씩 다를지도 모르겠다. 그 빛들이 어우러지고 아우러져 금빛 자욱한 향연장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그 빛깔만 보고도, 저건 김 씨네 논이고, 저건 이 씨네 논인 것을 안다. 같은 농사라도 가꾸고 다듬는 손길에 따라 차이가 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찌 빛깔만이랴. 그 손길에 따라 낟알의 여물기도, 맛과 질도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저 질펀한 금빛이 출렁이는 황금 들녘을 다시 본다. 알곡을 살찌우는 갈바람이 분다. 바람 따라 결을 이루며 출렁이는 저 빛을 보면 모두가 한 빛이다. 짙고 옅은 빛깔도 없고, 밝고 어두운 빛깔도 따로 없는 한 빛의 물결이다. 오히려 그런 여러 빛들이 하나로 합쳐져 더욱 찬란한 금빛을 만들어내고 있다. 눈부신 빛이 어우러지고 있다.

저리 서로 어우러지고 있는 빛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논을 본들, 뉘 집 벼를 본들 넉넉하지 않고 푸근하지 않으랴. 어느 새 사람들도 들판의 빛깔을 닮아가는 것 같다. 저 짙고 옅은 빛깔들이 모여 한 빛을 이루 듯, 집집이 사람사람이 사는 모습은 다 달라도 서로 이웃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푸근한 인심이야 뉘 집인들 다를까.

김 씨네는 김 씨네대로, 이 씨네는 이 씨네대로 살림살이도 다르고, 지고 있는 사정도, 품고 있는 사연도 다를 터이지만, 그 살림살이며 그 사정과 사연을 서로 다 알고 있는 이웃들이다. 서로들 어루만져 주는 사정이요 사연들이다. 들판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 가슴이다.

김 씨네 집에서 타작 밥 먹으러 오란다. 한창 황금빛이 무르녹아 가는가 싶더니 드디어 김 씨네 먼저 타작마당에 나섰다고, 알곡 많이 털 수 있기 바라며 참을 함께 하잔다. 풍성한 수확을 빌고 빌어주는 마음들이 들판의 금빛을 더욱 무르녹게 한다.

황금 들판이 어디 들녘에만 있으랴. 가을엔 마을도 들녘도 모두 금빛이다. 들녘은 사람들의 마음을 닮아 더욱 찬란한 금빛을 띠어 가고, 사람들은 들녘의 황금빛을 닮아 더욱 눈부신 인심을 키워 간다.

황금빛 어우러지는 가을에는 들판이 더 찬란해지는가. 사람들이 더 찬란해지는가.

가을 들녘에 서면 땅도 사람도 모두 황금 들판이다. 아늑하게 찬란한 들판이다.

메뚜기 한 마리가 포르륵 이삭 위를 가벼이 난다.(2014.10.12.)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부목  (0) 2014.11.10
계절 여행  (0) 2014.10.30
가을 논들에 서면  (0) 2014.10.09
탈춤과 유교의 고장 안동을 가다  (0) 2014.10.02
가진 것이 참 많다  (0) 2014.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