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가진 것이 참 많다

이청산 2014. 9. 12. 14:36

가진 것이 참 많다

 

이 한촌을 몇 년 사는 사이에 가진 것이 참 많아졌다. 나는 지금 생애 최대의 부요를 누리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이 나의 것이고, 아침마다 걷는 그 강둑이 나의 것이고, 강둑에 피는 풀꽃이 모두 나의 것이다. 곧 누렇게 변해 갈 푸른 들판이 나의 것이고, 그 들판에 알알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삭들이 모두 나의 것이다. 소나무, 노간주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가 무성히 우거진 뒷산이 나의 것이고, 그들 가지에 깃들어 사는 새들이 나의 것이고. 그 숲 사이에 함초롬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산꽃들이 모두 나의 것이다. 나만의 것은 아니어도, 함께 있노라면 저들은 언제나 모두 나의 것이다.

아침 강둑을 걷는다. 말갛게 얼굴 씻은 강물이 경쾌한 리듬으로 노래를 부르며 흐르고 있다. 달 따라 밤을 지킨 달맞이꽃이 밤새 안녕을 물으며 방긋 미소를 짓는다. 발그레한 유홍초도 작은 꽃 나팔을 한껏 벌리고 아침을 맞고 있고, 남빛 달개비도 벼슬 돋우어 다정히 인사를 한다. 자욱이 흔들리는 억새꽃 너머로 흐르는 강물이 윤슬을 반짝이며 손을 흔든다.

모두 나를 위해 오늘 아침을 열고 있는 것 같다. 저들이 이토록 나를 반기고 내가 저들 속에 이리 깊이 들고 있는데, 이들이 어찌 나의 것이 아니랴. 풀꽃 함초롬한 강둑을 걷다가 보면 내가 풀꽃이 되고, 풀꽃이 나인 것도 같다.

강둑을 내려와 들길로 든다. 푸른빛 창연한 논들에 한창 영글어 가고 있는 벼 이삭이 일제히 고개 숙여 내 발걸음을 반기고 있는 듯하다. 저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도열한 대신들의 알현을 받고 있는 군주와 같이 으쓱해지기도 한다.

내가 이 논들 어느 논의 임자라면, 여느 농부처럼 가을의 풍성한 소출을 기대하며 거름 넣고, 정성스레 모 심고, 물 대고, 그리고 튼실하게 자라 주기 바라며 비료 주고 제초제 뿌리고, 혹 병충해를 입을까 저어하는 생각에 독성 짙은 약을 치며 땀 젖은 이마를 닦을까.

한 일 없이 이것들을 바라보기가 농부들에게 참 무렴한 일이지만, 풍요가 출렁이고 있는 논들 가운데 서 있으면 마음도 몸도 그렇게 넉넉할 수가 없다. 저 모습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쑥쑥 자라 오르던 모가 어느 덧 영글어가는 이삭을 밀어 올려 깊은 사색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 삶을 한 번 돌아도 보고 싶어진다. 이 자연 앞에서 정녕코 자연이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해거름 산을 오른다. 날마다 오르는 산이지만 오를 때마다 모습이 새롭다. 온갖 나무들이 새롭고, 나무들 사이에 소곳이 핀 풀꽃들이 새롭고, 가지에 앉아 우짖는 새소리가 새롭다. 날마다 달마다 새로운 꽃이고 새로운 소리다.

지난봄에 산을 현란하게 수놓던 산벚꽃이며 진달래는 지고 없지만, 우거진 솔숲과 함께 잎 넓은 나무들이 짓는 그늘이 정 깊은 이의 품인 듯 아늑하다. 양지꽃이며 제비꽃은 제철 따라 가버렸지만, 함초롬히 핀 참취꽃, 뚝갈꽃, 며느리밥풀꽃이 정겹기 만하다.

산을 오를 때면 온 나뭇가지들이 나를 반겨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고, 뭇 산꽃들이 나를 고대하여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 같다. 새소리도 서로 어울려 화음을 이루며 나를 위한 송가를 부르고 있는 것 같다. 저들이 이토록 나를 반기거늘, 내 어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으랴.

이 산의 산주가 누구든, 넓이가 얼마나 되든, 그 넓이에 어떤 값이 매겨지든, 이 수종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이든, 내가 알 바도 마음 둘 바도 아니다. 내가 이들 속에 들고 이들이 내 안으로 들면 족할 뿐이다. 그 때 산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되고, 나 또한 저들의 일부가 될 뿐이다.

후다닥! 깜짝 놀랐다. 고라니 혹은 너구리가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 소스라쳐 달아난다. 내가 너희들을 언제 놀라게 했느냐. 너희들이 나를 놀라게 했을 뿐이다. 산을 오르고 내리다 보면 저들도 내 발자국에 익숙해지리라. 언젠가는 친구 삼아 주리라.

한껏 푸근해지고 포근해진 가슴을 안고 걷는 걸음걸음마다 발을 간질이는 풀잎의 애교를 살 속 깊이 받으며 산을 내려온다. 산자락에 외로이 서있던 감나무가 막 익으려는 감 하나를 툭 떨어뜨린다. 주워 입을 대니 제법 삭은 단맛이 들었다. 산 모두가 단맛으로 느껴진다.

문득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거든 낙심하지 마라.”고 한 괴테(Goethe)의 말이 떠오른다.

괴테의 공기며, 태양, 물 그리고 사랑이란 모두 무위(無爲)의 생광한 재물이 아니던가. 내 이미 강이며 들이며 산이며, 거기에 깃들어 있는 바람이며 풀꽃이며 새소리며, 무위의 재물을 이리 풍족히 가졌거늘 무엇을 낙심하며 무엇에 더 욕심을 낼 수 있으랴.

나는 가진 것이 참 많다. 한촌의 바람과 더불어 사는 사이에 참 많은 것을 얻었다.

, 이 넉넉함에 취한 탓이었을까. 오랜 친구를 잠시 잊고 있었구나. 은근한 문자라도 띄워 안부를 물어야겠다.

……언제 한 번 놀러오게. 내 가진 것 좀 나누어 줌세~^-^”(2014.9.7.)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논들에 서면  (0) 2014.10.09
탈춤과 유교의 고장 안동을 가다  (0) 2014.10.02
계절의 질서  (0) 2014.08.26
여기 그리고 오늘  (0) 2014.08.20
애타는 상사화  (0) 2014.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