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계절의 질서

이청산 2014. 8. 26. 14:53

계절의 질서

 

강둑길 풀숲에 유홍초와 달개비꽃이 붉고 푸른 빛깔로 조화를 이루며 곱게 피었다. 갈퀴나물꽃이며 익모초꽃도 줄기를 따라 어여쁘게 피어있고, 사위질빵꽃도 뻗어가는 넝쿨을 타고 잔잔히 피어있다.

초여름까지도 절정을 이루었던 개망초는 서서히 꽃을 거두어가고 황새냉이며, 꽃다지, 산괴불주머니는 따뜻한 봄날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제 좀 있으면 벌개미취며 구절초, 쑥부쟁이가 강둑을 수놓게 될 것이다.

올해만 그렇게 피는 것이 아니다. 때가 되면 때에 맞추어 해마다 그렇게 피어나고, 지금도 그 때를 따라 피고 지고 있다. 마치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피고 지기를 거듭해 나가는 것 같다. 그 시간표는 누가 짜놓은 것일까.

봄이 오면 잎이 피고, 여름이면 무성한 녹음을 이루다가, 가을이면 물들어 떨어지고, 겨울엔 맨살이 되어 다시 생장을 준비하는 나무들-. 생각할수록 계절은 너무나 질서가 반듯하다. 어디 나무들뿐일까.

자연에는 모두가 질서가 아닌 것이 없다. 밝음도 어두움도, 더위도 추위도, 눈비도 바람도, 새소리도 풀벌레소리도 제 때를 타지 않는 것이 없고, 길고 짧은 날도, 피고 지는 풀꽃도, 나고 죽는 모든 목숨 있는 것들도 모두 제 때를 맞추어 운행되고 있다.

이렇게 질서 정연한 자연이 제 운행의 괘도를 벗어나 이변이 생겨 질서가 무너지면 자연의 생태도 이지러지지만, 사람들도 불편을 면치 못한다. 심지어는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연이 제 질서를 늘 잘 지켜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질서 있는 삶, 규칙적인 생활에서 가끔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틀에 메인 삶이 너무 답답하다며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거나, 용기가 지나치게 끓는 사람은 끔찍한 파괴 행위로 세상을 섬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도 정연한 자연의 질서를 보고는 왜 숨 막히다 하지 않는가. 그 반듯한 질서가 답답하다며 이 자연 현상에서의 탈출을 꿈꾸지 않는가. 오히려 이 질서 속을 찾아드는 사람들은 무엇이며, 자연과의 동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사람도 결국은 자연을 구성하는 한 요소요, 그 한 부분일 뿐이다. 자연과 사람은 둘이 아니다. 자연의 질서 정연한 운행 속에서 꽃이 피어나고, 새가 울고,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 듯, 사람도 그 질서 속을 살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일상의 일탈을 위하여 여행이나 도전을 꿈꾸기도 하지만, 결국은 일상과는 좀 다른 자연의 질서를 동경하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자연의 세계를 찾아갈 뿐이다. 자연의 질서를 도외시한 여행이나 도전이 때로는 무서운 재앙으로 변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목도하지 않는가.

사람도 자연의 한 부류일 바에야 자연으로 살기를 애쓸 일이다. 문화와 문명이 좋다고 하지만,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것일 때라야 사람을 편하게 할 수 있다. 자연은 결코 꾸밈이 없다. 그대로의 것이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를 거스른 문화와 문명이 오히려 해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우리는 또한 겪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자는 때도, 일어나는 때도, 밥을 먹는 때도, 산책을 하는 때도 가능하면 정해 놓은 시간에 할 수 있기를 애쓴다. 그것이 자연의 질서요, 이법이기 때문이다. 자연도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운행이 되듯, 내 몸 또한 일정한 리듬으로 살아 숨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맛난 것도 많지만, 가능하면 자연의 것을 먹으려고 애쓴다. 자연인 사람이 자연의 것을 취하여 몸을 돕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텃밭에 나있는 상추로 쌈 싸먹고, 정구지로 전을 부쳐 먹기도 좋아하지만, 그 사이에 나있는 비름을 뜯어 삶아 무쳐 먹기를 더 좋아한다. 더욱 자연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제 그 시간에 아침 산책길을 걷는다. 평생에 제 시간의 산책길을 어긴 건 단 두 번, 프랑스 혁명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다가,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을 때뿐이었다는 칸트(Kant)의 경지를 따라 갈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시간을 지키려고 애쓴다. 물론 자연의 질서를 닮으려 함이다.

때를 알아 꽃들이 피고, 때를 맞추어 새로운 풍경을 그려내는 계절의 질서가 아름답다. 그 질서가 곧 자연이다. 자연이 곧 자유라는 말도 있다. 자연도 자유도 모두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서가 곧 자유다. 나는 오늘도 그 질서의 자유 속을 걷고 있다. 그 자유 속을 느긋하게 자유(自遊)하고 있다.

자유롭게 자유하는 오늘 아침 따라 분홍빛 무릇꽃이 유난히 곱다. 반짝이는 윤슬을 담고 흐르는 강물 빛이 눈을 맑게 한다. 내일은 또 어떤 꽃이 나의 아침 산책길을 반겨 맞을까. 강물은 또 어떤 물빛으로 흐를까.(201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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