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여기 그리고 오늘

이청산 2014. 8. 20. 12:56

 

여기 그리고 오늘

 

누가 휴가철을 맞아 어디 좋은 곳에 휴가를 다녀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지금도 휴가 중이라고 했다. 몇 년 째 좋은 곳에 휴가 중이고 나의 휴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도 했다.

누구는 따로 날을 받아 휴가를 간다고 하고, 그 휴가를 위하여 고르고 골라 풍광 좋고 놀기 좋은 곳을 찾아간다지만, 나는 벌써 몇 년 전에 휴가 기간을 정했고, 오래전부터 벼르고 벼른 곳에서 목하 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부산스러웠던 인생의 한 막을 접고, 이제는 지난 생애를 지그시 누르고 앉아 아늑한 휴가의 나날을 즐기고 있다. 지금 내가 산책을 하든, 책을 읽든, 차를 타든, 정다운 이와 만나 담소를 나누든 모든 것이 휴가다. 삶이 된 휴가다.

내가 지금 휴가를 보내고 있는 곳보다 더 좋은 휴가지가 있을까. 산과 물이, 나무와 풀꽃이,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있고, 정 따뜻한 이웃이 늘 함께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설령 있다고 한들 부러워할 일이 없다.

아침 강둑길을 걷는다. 날마다 걷는 내 오랜 휴가지의 산책길이다. 반짝이는 윤슬을 싣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며, 푸르고 붉은 꽃이 피어 있는 풀숲을 바라보는 일이 즐겁다. 발을 간질이듯 어루만지는 풀잎 사이를 지나며 뚝뚝 파란 물이 들을 것만 같은 하늘을 이따금 쳐다보며 걷는 길이 즐겁다.

누가 자유와 자연은 같은 말이라고 했던가. 아무것에고 걸림이 없이 흐르는 저 강물이며 함초롬히 피어있는 저 풀꽃들은 자유다. 무엇에도 거리낌이 없는 자연이다. 이것들을 바라보면서 이것들 속을 걷고 있는 나 또한 얼마나 자유이고 자연인가. 이보다 더 즐거운 휴가가 어디에 있을까.

강둑길을 내려서면 펼쳐지는 싱그러운 초원. 모내기를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모들이 한껏 자라 짙푸른 초원을 이루고 있다. 시간은 한껏 자유로이 흘러 저들을 저리 푸르게 했다. 눈결이 한껏 시원해진다. 마음결이 아주 맑아지는 듯하다.

시간은 또 저들을 금빛으로 물들게 할 것이다. 그 황금빛을 바라보는 마음은 또 한껏 풍요로워질 것이지만. 이 푸른빛도 그 풍요로움 못지않게 마음을 아늑하게 한다. 들판의 저 빛깔 같은 삶은 어떤 삶일까. 문득 저 빛깔로 살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본다.

하기야 무엇을 욕심내고 무슨 빛을 탐하랴. 모두가 자연이 아니던가. 푸른빛도 자연이요, 누른빛도 자연이 아니던가. 저 빛도 자연이요, 저 빛들을 싸안고 흐르는 바람도 자연이 아니던가. 자유가 아니던가. 오직 자연으로 자유로 살 일이다.

들판을 지나 마을에 든다. 집집마다 훤히 열린 대문, 아니다. 이 마을에는 대문이란 게 없다. 있다 한들 제 구실을 잊은 지 오래다. 누구네 집 연장을 누가 쓴들 무슨 상관이랴. 내 집에 맛난 것을 어찌 혼자 먹으랴.

감자를 삶아 놓았다고, 옥수수를 쪄놓았다고 이 집 저 집에서 부른다. 부르기가 번거롭다 싶으면 대문간 어디에 슬그머니 갖다 놓으면 그만이다. 누가 갖다 놓은지를 모르면 어떤가. 어차피 한 집 같은 사람들이 아닌가.

내일은 모처럼 대처로 나아갈 날이다. 시 읽기를 좋아하고, 좋은 시 읊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을 만나러간다. 서로 머리를 맞대어 좋은 시를 찾고, 찾은 시를 함께 읽고 외며, 나름대로의 느낌을 보태어 낭송을 한다.

낭송이 좀 익으면 그 기량들을 모아 두 달에 한 번쯤 낭송회를 가지고, 한 해에 한 번은 무대를 마련하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낭송의 아름다움을 함께 즐긴다. 그런 사람들을, 그 모임을 찾아가는 길이 즐겁다. 시를 가슴에 머리에 넣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런 길을 위하여 모처럼 차를 타는 일도 즐겁다. 시외주차장으로 가서 한적한 길을 달리는 차를 탄다. 달리는 차 안은 나의 해방 공간이다. 차창 밖의 무슨 경치를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해도, 무슨 책을 읽어도, 때로는 조그만 자판을 두드리며 무슨 글을 적어도 오직 나의 즐거움일 뿐이다. 도회를 멀리 둔 한적한 삶이 아니었다면 모처럼 차를 타는 이 재미를 어떻게 누릴 수 있으랴.

조용하고도 맑고, 따뜻하고도 아늑한 이 휴가지가 좋다. 어쩌면 남은 생애를 모두 묻어야할지도 모를 이 휴가지를 사는 오늘이 좋다. 오늘이란 무엇인가. 어제가 될 날이고, 내일이었던 날이 아닌가. 오늘이 즐거우면 어제가 즐겁고 내일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가끔은 여기 그리고 오늘을 사는 재미를 어쭙잖은 글로마나 쓸 수 있다는 것이 또한 얼마나 즐거운가. 문득 어느 수필가가 쓴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그는 어떤 심정으로 이런 시를 썼을까.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 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피천득, ‘이 순간’)

그리고 여기, 오늘을 사는 굳건한 즐거움을 위하여 페르시아의 금언 하나를 가슴에 품는다.

모든 기억을 자기에게서 멀리 하라. 지나간 일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사랑의 광명 속에서 살라.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지나가게 하라.”(2014.8.18.)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진 것이 참 많다  (0) 2014.09.12
계절의 질서  (0) 2014.08.26
애타는 상사화  (0) 2014.08.13
발칵 뒤집어놓고 싶다  (0) 2014.07.27
시의 푸른 열정 속으로  (0) 2014.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