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애타는 상사화

이청산 2014. 8. 13. 10:58

애타는 상사화

 

이 여름을 애태우고 있다. 마을 숲의 상사화 때문이다.

소나무며 느티나무, 팽나무, 회나무, 참빛나무 노거수들이 서로 손을 잡듯 가지를 뻗고 있는 마을 숲은 마을의 허파요 심장과 같은 곳이다. 마을 숲은 사철을 두고 늘 아늑하고 정겨운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편안과 위안을 주고, 희망과 평화를 느끼게 한다.

내가 한 생애를 마감하고 두그루부치기의 삶을 시작하면서 이 마을을 새로운 삶의 터로 삼은 까닭 중의 하나가 된 것이 바로 이 숲이다. 맑고 아늑한 푸름과 숱한 세월을 안고 있는 듬직한 정밀감이 마음을 잡은 것이다.

숲에는 마을의 수호목으로 서있는 수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안녕을 비는 제단을 거느리고 있고, 제단을 감싸고 있는 울 주위로 온갖 풀들이 자욱이 나있다. 풀들 속에 개망초며 미나리냉이, 닭의장풀, 유홍초 꽃들이 숲의 정취를 더해준다.

그러나 그런 풀꽃들은 마을 숲에 오래 머물지를 못한다. 숲이 한창 짙어지는 유월 중순쯤이면 숲을 아끼는 마을사람들에 의해 말끔히 정리된다. 여름이면 노거수 그늘을 즐길 마을사람들이며 마을을 찾아올 사람들을 위해 풀들을 모두 베어낸다.

날이 더위지면서 숲에는 활기가 넘쳐난다. 색색 천막이 쳐지고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숲을 누빈다. 가끔은 조그만 무대가 마련되기도 하여 흥겨운 노래 소리가 숲을 휘덮기도 한다. 마을사람들보다는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로 더 붐빈다. 마을 숲은 향수의 자리이기도 하다.

여름이 무르익어가면서 휴가철로 들 때면 마을 숲은 한 번 더 다듬어진다. 나무 아래의 모든 풀들은 베어지고 파란 잔디며 잔잔한 풀들만 남아 편안하고 아늑한 쉼 자리가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숲의 품에 안기기를 즐긴다.

몇 차례 숲이 정화될 때에도 없어지지 않고 남는 것이 있다. 남아서 꽃이 되는 것이 있다. 몇 줄기 돋아나는 상사화다. 고운 꽃빛을 기려서일까. 꽃 속에 스며있는 애달픈 전설을 새겨서일까. 다른 풀은 다 베어낼 때도 상사화의 촉이며 대궁만은 잘라내지 않는다.

세속의 여인이 스님을 연모하다가 승방 앞에서 죽어 꽃이 되었다기도 하고, 혹은 세속의 여인을 그리워하던 스님이 죽어 꽃이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꽃 상사화-. 이루지 못할 사랑 앞에서 쓸쓸하고 안타까이 죽어가야 했던 애틋한 사연을 품은 꽃이라서 그러할까, 꽃이 지고서야 비로소 잎이 돋아 서로 그리워만 하면서 영원한 이산의 한생을 사는 꽃이요 잎이어서 그러할까. 보기만 해도, 그 이름을 뇌기만 해도, 무언가를, 누군가를 문득 생각나게 하고, 그리워지게 한다.

더위도 한더위로 치달을 무렵인 칠월 말, 팔월 초가 되면 촉을 내밀기 시작하는 상사화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대궁을 피워 올린다. 오래된 부엽토를 뚫고 잎도 없이 맨살로 솟아나오는 대궁은 그리 모질게 생기지도 못한 모습이 커갈수록 애잔해만 보인다.

매일 아침 나서는 산책길이면 맨 먼저 발길이 이끌려지는 데가 마을 숲 상사화가 소곳소곳 피어나고 있는 곳이다. 볼 때마다 손가락 하나 길이쯤은 더 자라 있는 것 같고, 머잖아 아릿한 연분홍 꽃술을 터뜨릴 것만 같다. 괜히 가슴이 설렌다.

, 어느 날 아침, 어느 행락객이 쳐놓은 천막 앞에서 갓 피어나려는 꽃술과 함께 처참히 짓뭉개어져 있는 상사화 대궁! 누가 그 여린 꽃에 이런 무지막지한 짓을! 순간, 속 어디 한 구석이 싱크홀(sink hole)처럼 무너져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누구를 향한 내 그리움이 무참히 짓밟혀버린 것 같기도 했다.

천막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숲 옆 강둑 정자에 희희낙락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필시 저들의 소행이리라. 점잖이 타이르기라도 해야겠다, 남은 꽃이나마 다치게 하지 말라고 호소라도 해야겠다 싶어 그 사람들에게로 간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사람들이란 마을 어느 노친네의 객지 권솔들이 아닌가. 휴가를 맞아 고향집을 찾아온 모양이다. 마을을 먼저 산 사람들에게 아직 이방인으로 보일 사람이 무어라 하는 것이 주제넘은 일 같아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키며 겸연쩍게 돌아섰지만, 왜 고향을 좀 더 알뜰히 사랑할 줄 모르느냐는 말이 혀끝을 곧장 맴돌았다.

살아서도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고단한 한살이를 보내다가 비명에 맞이한 죽음 앞에서도 서럽단 말 한 마디 못할 처지가 되는가 싶어, 살아남아 쓸쓸히 서 있는 꽃대가 자못 처연스럽기도 하고, 손만 대면 속절없이 꺾일 듯한 그 순박한 자태가 미욱스럽기도 했다.

남은 꽃이나마 탈 없이 잘 피어나기를 오로지 빌며 마을 숲으로 날마다의 아침 산책길을 드는데, 며칠은 잘 피어난다 싶더니, 웬 걸! 또 누가 대궁 몇 개를 무람히 짓밟아 놓았다. 가까이서 놀고 있는 사람에게 물으니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또 어디가 하소연을 할까.

이제 다른 도리가 없다. 말뚝과 끈을 들고 숲으로 갔다. 쓰러진 꽃 대궁 근처에 말뚝을 박고 건너편 나무로 이어 끈을 둘렀다.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대궁까지 울안에 넣자니 울이 좀 널찍해졌지만 모두 살리자면 어쩔 수 없다.

헤치려하면 이 여린 울쯤이야 못 넘을까만, 굳이 울을 넘어서까지 헤치려하랴. 울을 둘러친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주지 않으랴. 울 두르기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답답한 가슴을 열어 안도의 날숨을 쉰다.

내가 울을 둘러 보듬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 선연한 꽃빛인가, 꽃에 서린 애틋한 사연인가. 무엇이라도 좋다. 사랑할 것이 있고, 그리워할 것이 있음에야-. 여름내 애태우고 있는 마음도 싫지만은 않다. 그 꽃도 잎도 잘 피어나기만 한다면-.(201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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