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한촌의 아침

이청산 2014. 5. 5. 14:39

 

한촌의 아침

 

 

한촌의 아침은 언제나 새로운 풍경으로 온다. 아침이면 고샅도 들판도 새롭고, 강도 산도 물도 나무도 다 새롭다. 한촌의 아침은 방금 세수한 처녀처럼 언제나 새 얼굴이다.

들판의 흙덩이조차도 어제 그 흙이 아니다. 새로운 바람을 맞고 쐰 새 흙이다. 아침을 향해 한껏 가슴을 벌린 저 들판의 흙 속에서 곧장 무엇이 돋아날 것만 같다.

저 두렁을 덮고 있는 풀꽃들, 애기똥풀, 눈괴불주머니, 봄까치꽃……. 어제 피어 있던 꽃다지, 봄맞이, 황새냉이는 어디에서 이 아침을 맞고 있는가.

밭둑의 노란 민들레 꽃잎들은 송이 씨앗을 남겨놓고 어디로 갔나. 유채꽃 빛깔이 더욱 샛노란 아침이다. 저 밭엔 또 무엇을 뿌리고 심어야 할까. 갈아놓고 골을 타놓은 밭이랑으로 말간 햇살이 스며든다.

엊그제 논을 갈고 봇도랑 물문이 열리더니 오늘 아침엔 노랑 모가 총총 아기 손을 내밀고 있다. 푸른 하늘을 머금은 논물이 어린모를 보듬는 모습을 앞산 싱그러운 숲이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다.

저 숲은 언제 또 저리 짙어졌는가. 울긋불긋 산꽃들이 눈길을 현란하게 하던 기억들은 그 꽃빛들마냥 선연한데 오늘 아침은 푸른빛이 세상을 덮고 있다. 산은 날마다 표정이 다르다.

햇살이 발을 담근 강물에 윤슬이 반짝인다. 오늘 흐르는 물은 어디서 온 것이며 어제 흐르던 물은 어디로 갔는가. 강물은 늘 깨끗이 씻은 얼굴로 흐른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숱한 세월을 두고 강물의 흐름을 지키고 있는 늙은 느티나무에도 새 잎이 반짝거린다. 아침 햇살이 잎새 위에서 율동을 하고 있다. 저 늙은 나무의 세월을 축복하고 있다.

저 산색이며 물빛만이랴. 아침 들길에 기계소리가 요란하다. 경운기 소리다. “이렇게 아침 일찍?” “고추 모종하러!” 그 기계소리, 말소리가 아침이면 언제나 새롭다. 철마다 다른 소리, 때마다 새로운 소리다.

한촌의 아침은 언제나 씻은 얼굴이다. 분단장은 아니 해도 늘 곱고도 생기로운 모습이다. 새로워도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어제 본 듯 정다운 모습들이다.

그 새뜻한 얼굴은 철과 때를 따로 가리지 않는다. 잎 피는 철에도, 푸름 짙은 철에도, 빛깔 익는 철에도, 설한풍 철에도 늘 새 얼굴이다. 철이면 철에 맞추어서, 때면 때를 타고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지어낸다.

한촌의 아침은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인다.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고, 푸나무가 살아 움직이고, 산과 강이 살아 움직인다. 흙이 꿈틀거리고, 물이 시를 읊고 있다. 고샅에 서있는 전신주마저도 얼굴을 씻고 섰다.

아침마다 생명이 솟음치고 있는 저 얼굴들을 또 어디서 볼 수 있으랴. 잿빛 빌딩 숲속에서 대할 수 있으랴. 매끈한 포장 도로 위에서 만날 수 있으랴. 없는 것이 없는 백화점에서 마주할 수 있으랴.

한촌의 아침은 날마다 새 얼굴이다. 새 얼굴로 열리는 아침이다. 한촌의 아침은 날마다 새 생명이 돋는다.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아침이다.

내일 아침은 또 어떤 얼굴로 열릴까. 어떤 계절을 거느리고 올까. 어떤 생명을 안고 올까. 강둑에는 또 어떤 꽃이 피어날까. 들판에는 무엇이 손짓을 하고 있을까. 그 아침이 보고 싶다. 그 아침이 그립다.

한촌의 아침을 보면 살고 싶다. 살아보고 싶다.(20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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