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꽃 피는 소리

이청산 2014. 4. 4. 22:17

 

꽃 피는 소리

 

봄이 오고 있다. 봄은 꽃으로 온다. 아니, 봄이 꽃이다. 꽃이 오고 있다.

매화어느 날 자고 일어나 마당에 나가보니 매화꽃이 하얗게 피었다. 해거리를 하는가, 작년엔 쉽게 피지 않던 것이기에 두고만 보고 있었던 것이 언제 봉오리를 맺어 소중히 간직해온 무슨 비밀을 터뜨리듯 가지마다 밤새 하얀 꽃을 활짝 피워냈다. 문 앞에 있는 앵두나무는 매화에 놀란 듯 봉오리를 봉올봉올 벙글어 내기 시작했다.

양지꽃산색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거의 날마다 오르는 산이지만 오를 때마다 빛깔이 달라져 있는 것 같다. 솔잎도 한결 푸르러진 듯한데, 노간주나무의 빛은 더욱 새뜻하다. 꽃말이 화사한 봄이라는 조그만 양지꽃이 날 봐달라는 듯이 방긋 미소 짓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운 생강나무는 노란 꽃송이를 제법 토실하게 달고 있다.

엊그제만 해도 망울이 일까 말까 하던 진달래는 또 언제 저리 활짝 꽃잎을 피웠는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기라도 할 양이면 봉오리를 열고 나와 벌어지고 있는 꽃잎의 움직임이 선연히 보일 것도 같다. 올괴불나무가 거북등 같은 소나무줄기에 가느다란 가지를 살며시 기대며 연분홍 조그마한 꽃들을 수줍게 피워내고 있다.

벚나무가 늘어선 강둑길을 걷는다. 아침마다 걷는 산책길이다. 한층 맑은 소리로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꽃눈을 틔우고 있는 벚나무는 머잖아 찬란한 꽃 잔치를 벌일 것 같다. 저 줄기, 가지 안에서는 그 잔치 준비에 얼마나 분주할까. 제법 몽실한 봉오리도 보인다.

무거운 몸을 털 듯 기지개를 켜고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에 피어 있는 노란 꽃, 올봄 강둑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산괴불주머니다. 늙은 나무에게 산괴불주머니봄소식을 아뢰고 싶기라도 한 듯 송송 노란 꽃술로 머리를 세우고 있다.

버들개지는 언제 저리 눈이 텄는가. 갓 난 강아지 꼬리 같은 것들을 총총 달고 있다. 저 밭둑을 노랗게 수놓고 있는 조그만 것들, 꽃다지다. 저것들은 언제 저토록 돋아나왔단 말인가. 저리 작은 것들도 무리를 이루니 한가득 꽃밭이다.

저 두렁의 것은 또 무엇인가. 조막손 같은 잎 손들을 겹겹 앙증맞게 벌리고 있는 잎새 속에 보일 듯 말 듯 파란 꽃을 피워내고 있는 큰개불알풀꽃이다. 누가 붙인 이름인지 고상하지 못하다 하여 봄까치꽃이라고도 큰개불알풀꽃부른다는 저 꽃, 그래도 꽃말은 고상하다. ‘기쁜 소식’, 또는 희망이란다.

그렇다. 기쁜 소식은 고상한 데서만 들려오는 것이 아니다. 희망이란 그럴싸한 곳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 지금 무슨 소식이 들려오는 것 같다. 무슨 소리가 희망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바람소리일까, 새소리일까.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아련하게 청아하게 들려오기도 하지만, 아니다. 사륵사륵, 아른아른, 나긋나긋, 소곳소곳……. 어디서 나는 무슨 소리일까. 꽃이 있는 곳에서, 꽃이 피는 곳에서 나는 소리일시 분명하다. 꽃 피는 소리다. 봄이 피는 소리다.꽃다지

청개화성(聽開花聲), 다산(茶山)은 연못에 배를 띄워 연잎 많은 곳으로 저어가서는 지그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니 연꽃잎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던가. 어찌 다산만 들을 수 있는 소리랴. 이 강둑, 이 들길, 그리고 빛깔 새뜻한 산길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들리고,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릴 것만 같다. 꽃 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때로는 혼자서 수줍게 부르는 가느다란 노래 소리로도 들리고, 몇이서 소리 맞추어 내는 유연한 가락으로도 들린다. 소리는 귓전을 아릿아릿 맴돌다가 살며시 숨죽이며 가슴속으로 들어와 앉기도 한다. 소리가 소리를 만들어 내 속에서도 곧장 무슨 소리가 봄비 소리처럼 울려 나올 것 같다. 봄은 소리의 계절인가.

올괴불나무꽃인디언들은 달력을 만들 때, 그들 주위에 있는 풍경의 변화나 심경의 움직임을 주제로 그 달의 명칭을 정하여 붙였다고 하는데, 봄이 오는 3월을 두고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이라 했다고 한다.

3월은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까. 피고 있는 꽃들이 아니랴, 그 꽃들이 피어나는 소리가 아니랴. 그 소리가 마음의 소리를 만들어, 마음이 소리되어 세상으로 나와, 마음이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이 세상의 생명을 움트게 하지 않았으랴.

이 소리가 들리는 봄에는 왠지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들판에라도 나가보아야 할 것 같다. 강둑이라도, 산길이라도 걸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운 사람 이름이라도 불러보아야 할 것 같다. 만나서 껴안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입맞춤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꽃으로 피는 그를!

꽃이 피는 봄 길에서, 꽃 피는 소리 아른한 봄 길에서-.(201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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