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시 외는 삶

이청산 2014. 3. 27. 10:26

시 외는 삶

 

대합실에 앉아 차를 기다린다. 타고 갈 차가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기다리고 있기가 지루할 것 같다. 외고 있는 시를 기억 속에서 불러낸다. 조병화의 서로 그립다는 것은이며 , 혹은도 외고, 조창환의 나는 늙으려고도 외어본다. 지루할 것은 같은 시간이 언제 그리 가버렸는지 차가 벌써 승차장에 들어오고 있다.

차를 탄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들을 감상하다 말고 외고 있는 시들을 떠올린다. 시와 더불어 어느 낭송콘서트에서 낭송했던 나의 수필 생일 풍경중의 한 구절도 떠오른다. “……활짝 피어난 웃음 꽃, 어쩌면 이 꽃 한 송이를 보기 위해 내 육십 년의 세월을 살아온 지도 모르겠다.……차는 언젠지도 모르게 목적지에 닿아간다.

목욕탕 안에 들었다. 물이 매우 뜨겁다. 느긋하게 몸을 담가 땀을 시원스레 빼고 싶은데, 펄펄 끓으며 솟는 물을 참고 견디기가 쉽지 않다. 시를 왼다.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해인의 능소화 연가를 외기도 하고, 오세영의 파도는을 외면서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바다를 떠올린다. 뜨거운 줄도 모르고 십여 분의 시간이 흘렀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듯한 기분으로 탕을 나온다.

시를 외고 있으면 무료하거나 지루할 겨를이 없다. 언제 시간이 흘러가는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쉽고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러나 시를 외며 흘리는 시간은 귀하고도 아름답다. 시 외기의 힘이 아니랴. 모든 시간을 귀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되게 하는 시 외기의 힘. 나는 오늘도 그 힘을 찾아간다.

낭송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 나도 그 모임 중의 한 사람이다. 두 달마다 한 번씩 모임을 가지고, 자기가 외고 있는 시를 낭송하면서 회원들로부터 소감도 듣고 평가도 받는다. 정기 모임의 발표자로 지목된 사람은 그 날의 발표를 위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따로 마련된 장소에 모여 회장님의 지도를 받아 연습을 한다. 그 걸 우리는 낭송 연찬이라 하고, 어느 회원이 제공한 우리의 공간을 낭송연찬실이라 한다.

낭송 전문가이신 회장님은 여러 사회교육기관에서 낭송예술과정의 명강사로 이름난 분이다. 회원들은 회장님의 헌신적인 지도를 고마워하며 성실히 연찬에 임한다. 두 달 동안 열심히 외고 익힌 실력을 정기 모임에서 드러내 놓는다.

회장님과 의논하여 외울 시가 정해지면 우선 시를 감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시의 비유와 상징에 대한 새김이며 그 느낌을 마음속 깊이 담는다. 고저, 강약, 완급, 감정 표현, 무대 매너 등에 대해 회장님의 지도 조언을 받으며 정성들여 외고 익힌다.

정기 모임을 통해 왼 시며 그 기량을 한데 모아 한 해에 한 번씩 개인 낭송, 시극, 합송, 퍼포먼스 등으로 구성한 무대를 마련하여 관객들 앞에서 낭송콘서트를 열기도 한다. 콘서트를 한 달쯤 앞두고는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수시로 모여 팀별로 열정을 다해 낭송 실력을 갈고 닦는다.

내가 발표할 차례가 되면 설렌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은 언제나 긴장되고 떨린다. 어떻게 하면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떨지 않고 늠름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틈만 있으면 시를 왼다. 산책을 하면서도 외고, 산을 오르면서 외고, 자전거를 밟으면서도 외고, 차를 달리면서도 왼다. 이리 저리 감정도 잡아 보고, 시와 시어의 분위기에 따라 높게도 낮게도 해보고, 빠르고 느리게도 해본다.

, 참 즐겁다. 산책길이 즐겁고, 산을 오르는 일이 즐겁고, 자전거를 밟고 차를 달리는 일이 즐겁다. 시를 외는 일이 살아가는 모든 일을 즐겁게 하는 것 같다. 우울해질 겨를도, 화를 낼 틈도 없다. 시 외기의 힘은 모든 울화를 물리치게도 하는 것 같다.

정기 발표 날이다. 어느 도서관 세미나실에 회원들이 모여 앉았다. 차례를 받아 앞에 나서서 왼 것을 발표한다.

하루에게/ 박주택/ 너는 어디로 가서 밤이 되었느냐 너는 어디로 가서/ 들판이 되었느냐. 나는……나는, 나는 지금 떨고 있는가. 회장님은 천천히, 천천히!’하라는 사인에 바쁘다. 멋진 낭송을 해보고 싶었는데, 너무 멋지게 하려다가 긴장해버렸는가.

후반부부터는 잘 나왔고 마무리도 잘되었다는 평을 듣고 있기가 겸연쩍고도 민망했다. 다른 회원들은 잘도 하는데 나는 왜 잘 안 될까. 그래도 시를 외는 일이 좋다. 시를 외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즐겁다. 그 시간들이 아름답다.

프랑스에선 암송 문화가 아주 성행하여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시 외기 교육을 시키고, 그리하여 어린이들이 라퐁텐이나 보들레르, 프레베르의 시를 줄줄 앙증맞게 외운다고 한다. 그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을까.

오늘 아침 산책길도 시를 외며 가는 길이다. “나의 이 노래는 다정한 사랑의 팔처럼 내 아기여, 너의 주위를 음악으로 휘감을 것을…….” 타고르의 나의 노래를 왼다. 배경 음악은 물소리와 새소리다. 들판도 마을도 눈길에 닿는 풍경마다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아내의 잔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던가. 그렇게 시를 외며 가는 길이 좋다. 시를 외며 사는 삶이 좋다.

좀 있으면 어느 낭송문학회에서 전국수필낭송대회를 개최한다던데, 거기에 나갈 준비를 한 번 해볼까? 내 수필 샐비어를 외며-.

……한생이 비록 길지 않을지라도 그 짧은 생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열렬히 타오르는 불길로 그 원망을 녹여냈다. 이제 샐비어는 조용히 그 불길의 재를 남기고 있다. 후회 없는 연소였다.……(2014.3.22.)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름으로 가는 길  (0) 2014.04.17
꽃 피는 소리  (0) 2014.04.04
봄비가 내린다  (0) 2014.03.20
산의 가슴  (0) 2014.03.10
구불구불 가는 길  (0) 201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