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봄비가 내린다

이청산 2014. 3. 20. 09:47

 

봄비가 내린다

 

 

봄비가 내린다. 는개인가 싶더니 잠시 가루비가 되었다가 보슬보슬 보슬비가 되어 내린다. 사람들은 그냥 단비라고 했다. 때맞추어 내린다고 좋아들 했다.

마침 논을 잘 갈아놓았네, 그려!” 엊그제 논갈이를 해놓은 조 씨가 기뻐했다. 속속들이 젖어들 것 같아 좋다는 것이다.

한촌의 봄은 조 씨네 논에서부터 기지개를 켜면서 왔다. 가려운 등을 긁어주듯 경운기로 논바닥을 긁어나갔다. 요란한 기계소리에 놀란 논바닥이 속살을 벌겋게 드러내며 갈라졌다.

봄의 속살이었다. 겨우내 꽁꽁 앙가슴을 움츠리고 있던 논바닥이 누가 슬쩍 찔러주기라도 기다렸다는 듯 쟁기를 대자마자 쩍쩍 가슴을 벌려 나갔다. 봄이 가슴을 벌려나가고 있었다.

아래 배미 김 씨네 논도, 중들 이 씨네 논도 깊은 속살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김 씨는 트랙터를 세내어 대여섯 마지기 논을 삽시간에 갈아치웠지만, 조 씨며 이 씨는 힘 두었다가 어디 쓸 거냐며 쟁기를 단 경운기로 한 골 한 골 갈아나갔다. 봄을 갈고 있었다.

봄의 속살 속으로 봄비가 내리고 있다. 살 속 깊숙이로 젖어들고 있다. 봄비가 봄물이 되어 이윽고 저 논을 채우게 될 것이다. 써레로 썰어 삶고 모판의 노릇한 모를 가져다 모내기를 하게 될 것이다. 저 봄비 속으로 벌써 새파랗게 자라나는 모가 보이는 듯하다. 그 초원의 꿈이 부퍼온다.

봄비는 마늘이 잠자고 있는 조그만 마당 텃밭에도 찾아왔다. 비닐 속에서 꽃잠을 자고 있던 마늘 촉을 하나하나 꺼낸다. 상기도 잠결에 젖어 있던 노란 촉들이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 새를 반기는 새끼 새들 마냥 비를 반긴다. 하나둘 굽은 등을 꼿꼿이 펴나가는가 싶더니 한층 푸른빛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생명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어느 시인은 봄이 오는 3월을 두고 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넓은 마음이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 앞에/ 풀잎과 꽃잎의 비단방석을 까는구나”(나태주, ‘3’)라고 했다.

3월이 되면 무엇이 추위와 가난을 이기게 하는 걸까. 무엇이 넓은 마음을 돌아오게 하는 걸까. 그리고 우리 앞에 비단방석을 깔게 하는 걸까. 바로 오늘 내리는 봄비가 아니랴.

봄비는 겨우내 품어왔던 모든 것들의 눈을, 움을, 싹을 비로소 세상의 것이 되게 한다. 봄비 속에서 태어난 것들은 꽃이 되고 잎이 되어 봄을 비단방석으로 눈부시게 장식한다. 눈부신 봄은 마음속의 추위와 가난을 물러가게 한다. 마음이 넉넉해지고 넓어지게 한다.

봄비가 내린다. 어디서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물소리도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모든 것이 맑고 밝은 노래가 되어 울려 퍼진다. 새 생명을 구가하는 노래 소리다. 새로운 걸음으로 들판을 걷고 싶고, 산을 오르고 싶다.

봄비를 맞은 땅이, 그 흙이 슬몃슬몃 움적거린다. 그 속에서 무엇이라도 니은니은 기어 나올 것 같고, 소곳소곳 솟아나올 것 같다. 개미가 기어 나올까. 꽃다지가 솟아나올까. 봄비를 맞은 흙은 정중동, 그 속에서 무엇이 곧장 고개를 들고 나올 것 같다.

비에 얼굴을 씻고 있는 산의 모습이 한층 생기로워 보인다.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슬슬 고개를 들어 올린다. 빗방울을 달고 있는 생강나무며 진달래가 겨드랑이가 가려운 듯 가지를 달싹이고, 구불구불 청미래 덩굴도 꿈 깬 하품하듯 몸을 떤다. 나무들은 지난 계절의 것들을 모두 내려놓을 때부터 오늘의 이 비를 기다린 지도 모르겠다. 뿌리에 가지에 생명의 물기를 적셔 준다면 반짝이는 생명을 피워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무가 꿈틀거린다.

봄비는 보슬보슬 보드랍게 내리지만 그 힘은 어머니 같다. 여리지만 강인한 어머니의 힘이다. 모든 잠자는 것들을 깨울 수 있고, 모든 것들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고, 생기롭게 그리고 활기에 차게 한다. 봄비는 생명의 물기다. 그 젖줄이다.

오늘 그 봄비가 내린다. 어머니 젖 내음으로 내린다. 속 깊이 젖고 싶다.

움을, 싹을 틔우고 싶다. 꽃으로 잎으로 피고 싶다.

꽃이 되고 잎이 되고 싶다. 봄비를 맞으며-.(201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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