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산의 가슴

이청산 2014. 3. 10. 10:49

산의 가슴

 

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이런 말로 시작한 글이 여러 편 된다. 그 만큼 해거름에 산을 오르는 일이 나의 일상에 아주 깊이 들어와 있다는 말이다. 몸의 단련을 위해서도 오르지만, 마음의 안식을 위해서도 오른다.

마을을 싸안고 있는 고샅 굽잇길을 지나 산자락 어귀로 들어선다. 밤나무가 서 있는 오래 된 묘지를 지나면 청청히 우거진 소나무 숲, 그리고 온갖 모습의 나무들이 어우러진다.

진달래, 생강나무, 산수유, 괴불나무, 물푸레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나무 나무들이 서로 어울리며 무성한 숲을 이룬다. 나무만인가. 청미래, 노박, 머루, 다래, , 어름 넝쿨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산을 자욱하게 한다.

하늘에 닿을 듯이 훌쩍한 것도 있고, 오목하게 품을 만들어 나직이 서로 어깨를 겯고 있는 것도 있다. 한 품으로도 다 못 안을 굵직한 것도 있고, 다른 나무들에 질세라 굵을 요량은 없이 키만 바지랑대같이 세운 것도 있다.

훤칠하게 쪽쪽 곧게 잘 뻗어 나간 것들만 있는가.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사지를 비틀면서 무슨 애교를 부리고 있는 듯한 것도 있고, 곧장 비명이라도 터져 나올 듯이 험하게 굽히고 휘어지고 꺾인 것들도 있다.

뭇 나무들은 봄이면 색색 꽃을 달고 여름이 되면 푸른 잎을 피우다가 가을이면 모든 걸 내려놓곤 하지만, 시절이 돌아와도 온 줄 모르고 제 빛을 잃고 있는 것들도 있다. 빛만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 몸을 지탱 못해 다른 것에 기대기도 하면서, 아예 몸을 눕혀 버린 것도 있고, 누워 흙이 되어가는 것도 있다.

어디 나무들뿐인가. 나무들을 제 집처럼 깃들어 의지하면서 지저귀고 있는 새들도 있고, 다람쥐며 청설모가 제 놀이터인 듯 재주를 부리기도 하고, 고라니며 토끼가 제 안마당처럼 뛰어 놀기도 하고, 멧돼지며 너구리가 산보하듯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뱀이 제 방인 듯 몸을 둘둘 감기도 한다.

나무들이며 짐승들만이 아니다. 때로는 하늘도 내려와 나뭇가지에 앉아 쉬어가기도 하고 우레와 벽력이 슬쩍 다녀가기도 한다. 그것들이 다녀갈 때는 좀 따가운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래도 산은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산의 가슴은 넓고도 깊다. 그 모든 것들을 한 품에 다 품고 산다. 나무도 품고 살고 짐승도 안고 산다. 큰 것은 세워주고 있고 작은 것은 안아주고 있다. 산 것은 살게 하고, 죽은 것은 보듬어 안는다. 그 많고 별스러운 것들을 어떻게 다 안고 품고 사는가.

산의 가슴은 은근하고 따뜻하다. 온갖 것들을 안고 보듬고 살면서도 내색을 일절 하지 않는다. 곱게 자라야 할 것은 자라게 하고, 편히 잠들어야 할 것은 잠들게 하면서 모든 것을 말 없이 감싸주고 있다.

산의 가슴은 넉넉하고 포근하다. 무엇이 그 가슴에 안겨도 내치는 법이 없다.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쳐 와도 다 안아주고, 구름과 안개가 까무룩 덮여 와도 다 가슴을 벌려준다. 산의 가슴에 안기는 모든 것들은 마침내 그 포근하고 넉넉함에 감동하고 만다.

산을 찾아간다. 산을 오르노라면. 화들짝 나서서 활짝 가슴을 벌려 반갑다고 하지는 않지만, 언제 찾아가도 손사래를 치는 법이 없다. 넓고도 깊은 가슴 속으로 은근하고 따뜻하게 그리넉넉하고 포근한 가슴으로 맞을 뿐이다.

산을 걷는다. 산의 가슴속을 걷는다. 내 가슴속이 들여다보인다. 나는 언제 누구에게 넓고 따뜻한 가슴이었던가. 나에게 그런 가슴이 있기나 한 건가. 나는 어떤 가슴으로 살아왔던가. 내 마르고 가난한 가슴으로 하여 아프고 서러웠던 이들은 없었을까. 산의 가슴속을 걸을수록 더욱 그립다. 산의 가슴이 그립다. 따뜻하고 포근한 가슴이 그립다.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함민복, ‘

 

어찌 삶에 지칠 때 만이랴. 지치지 않아도 찾아가 안기고 싶다. 왜 먼발치에서 바라다보기만 할까. 가서 덥석 안고 싶다. 그 가슴을 내 가슴속에 담아 넣고 싶다. 언제 그 가슴이 될 수 있을까.

그 가슴을 볼 수 없게 되는 날이 바로 그 가슴이 되는 날일까. 넓고도 깊고, 은근하고도 따뜻하고, 넉넉하고도 포근한 가슴이 되는 날일까.

나는 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그 가슴을 찾아 오른다. 그 가슴을 안으려, 그 가슴에 안기려 오른다.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그 가슴에-.(20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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